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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권 세태풍자 소설 ‘불 꺼진 무인등대’ 제2부 <1> 화정

무당 화정은 한 시대를 화려하게 풍미한 여인이었다

글/김영권(소설가) l 기사입력 2020-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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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요정’으로 회자되며 잘나가는 남자들로부터 선망받았던 존재
은막의 스타보다 더 깊은 곳의 욕망 자극했던 희귀 영육의 소유자

 

화정은 무당이기 전에 유력한 정치인들, 특히 역대 대통령의 연인
사실 확인이 된 건 아닌데 20여 년 동안 계속 그런 풍문 떠돌고…

 

구름 한점 없이 청명한 하늘이다.
따스한 한낮의 햇빛을 등에 받으며 한 사나이가 느릿느릿 걷고 있다.


“그는 누구일까? 아냐, 그가 누군지는 이미 밝혀져 있어…음, 그들은 누구일까라고 묻는 게 오히려 좋겠지. 그들을 일렬로 쭉 세워 놓으면…과연 어떤 의미가 생겨날까? 역시 식상한 듯싶군. 혹은 그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식어빠진 질문일 뿐일까?”


사내는 마치 연극무대에서 독백하는 배우처럼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약간 야윈 편이지만 결코 허약해 보이지 않는 건 검은 눈동자 속에 깃든 정기 때문인지 몰랐다. 어딘지 미남형이긴 해도 배우처럼 번듯이 드러나기보다 좀 꺼벙스러운 듯싶은 건 꾸밈새 없고 일견 순수해 보이는 인상 탓일까.

 

▲ 청담동에서 용하기로 소문난 미녀 보살, 태랑. 쭉빵 외모에 억대 연봉,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그녀지만 스물여덟 전에 운명의 남자를 만나야만 액운을 피할 수 있는 사주를 타고 났다. 사진은 영화 ‘청담보살’ 한 장면.

 

역대 대통령에 대한 고찰


“이승만, 박정희,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그는 혼잣말을 계속했다.


“그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일 뿐이지. 만일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제 아무리 잘났든 못났든 여기 호명되진 않았겠지. 아마…김대중은 지지자들이, 전두환은 본인 스스로 항의할지도 몰라. 하지만 무슨 대수랴. 산 자들만이 욕망의 불에 사로잡힌 채 고함칠 뿐, 죽은 이들은 무덤 속에서 영욕을 덧없어 하며 편안히 잠들길 바랄지도 모르리라…음, 어쨌든 국민들이 희귀한 한 표의 자기 권리를 행사해 그들을 뽑았으니…그들에게만 영광과 치욕을 떠넘기지 말고 함께 손가락을 내밀어…시퍼런 작둣날의 심판을 (생각 속에서나마) 받아야 하지 않을까?”


중얼거리던 사내는 불현듯 번쩍이는 자가용 한 대가 눈앞에서 급정거하며 클랙슨 소리와 욕지거리가 귓속을 질타하는 바람에 흠칫 놀랐다. 신나게 달려 내려가는 차의 뒤꽁무니를 향해 그는 침을 찍 내뱉었다.


“니미럴 놈의 썅 개시키 같으니…그래, 내가 좀 공상에 잠겨 있었다 치자. 그렇다고 전용차로도 아닌 이 좁은 골목길에서 사람이 잠시 발길 가는 대로 좀 걸을 수도 없단 말이냐? 개씹으로 낳은 성싶은 자식, 저 밑의 큰 도로를 씽씽 내달리다가, 신호등 색깔을 분간 못해 횡단하는 맹인을 치어 죽이고도 킬킬 비웃을 자식…아아, 그렇게 한 손에 애완견을 안은 채 운전하며 길 가는 사람에게 추접스런 욕을 내뱉기보다는 차라리 공상적 무단횡단죄로 고발하라!”


그는 불그레한 독사 눈알 같은 차의 후미등을 망연히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너무 급작스런 일이라 운전석에 앉은 자가 머리를 길게 기른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그 와중에도 한쪽 팔에 귀여운 하얀 개를 안고 있는 건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 공상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자유 만발의 세상…그런데 아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음, 그래.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고찰을 막 시작한 참이었지. 사실, 미래의 대통령에 대해서는 공상할 수 있어도 과거의 대통령에 관해서는 그럴 수가 없는 노릇이야…한데 왜 문득 그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을까?…음, 아마 지금 영험스럽다는 화정 무당을 만나러 가는 길이기 때문인지도 몰라.”

 

한 시대 풍미한 화정 무당


그는 마음을 추스르는 듯 푸른 하늘을 쳐다보았다.


무당 화정은 한 시대를 화려하게 풍미한 특이스런 여인이었다. 꽃요정이란 별칭으로 회자되며, 잘나가는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로부터도 선망을 받았던 존재. 어떤 면에선 화려한 은막의 스타보다 더 은밀하고 깊은 곳의 욕망을 자극했던 희귀한 영육의 소유자….


화정은 무당이기 전에 유력한 정치인들, 특히 역대 대통령의 연인이었다. 사실 확인이 된 건 아닌데 20여 년 동안 계속 그런 풍문이 떠돌고 있었다.


오래 전에 한강교에서 피살당한 정인숙과 비슷한 경우라고나 할까. 다른 점이라면, 정 여인은 죽어 버려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지만 화정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요즘 살인마라고 지탄받는 전직 대통령마저 번연히 회고록을 내는 세태에 자극을 받았는지 혹 다른 까닭 때문인지 모르지만 불현듯 자서전을 낼 계획에 사로잡혀 있었다. 계획이라기보다 영감이라고 하는 게 정확할지…위험의 화근이 될지 모른다.


‘보지(寶池)를 통해 제정일치를 이룬 여인!’


화정에게 비판적인 사람들은 그런 음담을 지껄이곤 했다.


사내는 느릿느릿한 걸음이긴 해도 쉼 없이 독백을 중얼거리며 아스팔트 길을 걸어 올랐다. 세검정을 지나 메마른 계곡을 쭉 따라 올라서 푸른 숲속에 묻힌 궁정 같은 어느 저택 앞에 멈춰섰다.


심호흡을 한 후 벨을 누르자 거대한 철대문이 곧장 열렸기 때문에 그는 좀 놀란 표정이었다. 어디선가 자기를 살펴보는 인조(人造) 눈을 의식한 듯 그는 심신에서 감정을 제거하려 애쓰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냉랭한 금속음에 흠칫해 뒤돌아보니 열댓 살쯤 된 미소년이 빙긋 웃곤 유령인 양 홀연 사라져 버렸다.


‘아마 아들이겠지. 헌데 그 미소는 꽤 기분 나쁘군. 마치 어린 기둥서방 같은 느낌….’


그는 입속으로 중얼거리던 말도 일순 멈추곤 정원을 지나 궁궐처럼 웅장한 저택을 향해 다가섰다. 개들이 컹컹 짖어댔다.


현관문이 열리더니 한 여인이 나타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빨강색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어디 외출하기 위한 정장 차림이라도 놀라울 텐데…붉은 빛이 도는 안경 아래로 입술, 루비 목걸이, 나비 날개처럼 살랑거리는 가벼운 평상복, 손발톱, 심지어 슬리퍼마저 온통 붉은 색이라 좀 괴이스러웠다. 안경알 너머 눈알 또한 불그스레했다.


얼굴과 목 그리고 슬쩍 드러낸 가느다란 팔만은 하얀 색이었지만 생기가 돌지 않아 시체 같은 느낌을 주위에 뿌렸다. 그래도 결코 늙어 보이지는 않았다.


“아, 어서 와요.”


그녀는 인사말을 던졌으나 젊은 방문객을 흘끗 살피곤, 눈길을 돌려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짐짓 어린 소녀 같은 손짓으로 기지개를 켰다. 가슴의 거무죽죽한 유두가 도드라져 보였다.


여인은 팔을 쭉 펴며 심호흡을 하더니 고양이처럼 몸을 돌려 현관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럼 이리로….”


목소리를 따라 그는 어떤 흡인력에 빨려들 듯 불그무레한 비밀스런 궁실로 발을 옮겼다.
대낮인데도 실내의 창엔 검붉은 커튼을 친 채 은근한 핏빛 조명이 흩뿌려지도록 장치해 두었다.


그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여인의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마치 바람결에 날리는 털뭉치처럼 층계를 뛰어 여주인보다 먼저 꼭대기에 사뿐히 올라앉아서는 각각 붉고 푸른 빛이 도는 두 개의 야릇한 눈알로 낯선 방문객을 내려다보았다.


만약 사람이라면 그런 괴상야릇한 눈으로 인해 심한 열등감에 빠지거나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할 텐데, 녀석은 오히려 무슨 천복이라도 받은 고귀한 존재인 양 오만스러웠다.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선택된 희귀종 고양이님의 도도함이랄까.


‘기이함은 평범함을 뛰어넘는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귀신이든 괴물이든 뭐든 상관없다. 희귀성만 보여준다면…이게 바로 신이다!’


그런 세태 혹은 시대정신을 표징하는 놈 같았다.
복도를 지나자 곧 널찍한 응접실이 나왔다. 눈짓으로 소파에 앉으라는 표현을 하며 여인은 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앉기 전에 검붉은 커튼을 슬쩍 열곤 유리창으로 수목이 풍성한 푸른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곧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뜬 다음 주위를 슬금슬금 둘러보았다.

 

▲ 일제강점기, 14살의 금화 ‘넘세’(김새론 분)는 위안부 소집을 피해 시집을 가지만 시댁의 모진 구박과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친정으로 도망친다. 사진은 영화 ‘만신’ 한 장면. 

 

‘인간이란 참 이기적’


사방 벽엔 색색가지 구슬로 한땀 한땀 꿰어 구성한 대형 일월산수도(日月山水圖)를 비롯해 금빛 액자에 넣은 각종 신령의 그림뿐만 아니라 박제품인 듯한 무소의 뿔 따위가 걸려 있었다. 고급스런 마호가니 탁자 위에 자리잡은 난초 화분 옆엔 곧 날아갈 듯 날개를 활짝 펼친 참매가 푸른 하늘을 꿈꾸며 대가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 눈알은 본래 면목이 아니라 붉은 루비 혹은 인조 보석을 박아넣은 것 같았다.


‘음, 아무리 청천 하늘을 날아 보려 해도 그럴 순 없을걸. 그건 너의 시체를 활용해 인간이 만들어 놓은 상징이니까. 흠, 너의 존재는 과연 어디엔가 있는가? 육신은 박제돼 인간의 노리개가 되었건만 영혼은 푸른 하늘을 떠돌고 있는가?’


그는 생각에 잠겨 남몰래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


‘인간이란 참 이기적이야. 뻔뻔스러울 만큼…이 세상, 이 지구, 이 우주에, 항상 자기를 가운데 놓고 싶어해. 저 멀리서 객관적으로 보면 개미보다 못한 주제에…천지인 중 자기네가 만물의 영장이니 뭐니 하며 시건방 지기가 짝이 없어. 만물 속엔 초목 금수와 벌레, 먼지, 쓰레기 비닐, 각종 병을 일으키는 병균 따위가 다 포함되는데도…무엇이 정녕 이익이고 손해인지 도외시한 채 자기 중심적으로 그저 눈앞의 안락만 좇고 있지.

 

그뿐인가. 삶과 죽음, 천당과 지옥, 신과 악마, 선과 악에 대해서마저 인간 제일주의의 조잡스런 깃발을 펄럭거리고 있지 않으냔 말야. 이기적이고 편견에 가득 찬 심판관 노릇을 하려는 자들…저 멀리서 객관의 눈으로 보면 벼룩이나 모기와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때 여인이 가슴팍에 뭔가 가득 안고 나왔다. 빨강 파랑 노랑의 빛깔로 고급스레 장식된 앨범이었다. 표지의 벨벳은 세월의 풍화를 겪었는데도 퇴색되지 않고 오히려 그윽한 추억의 기색을 풍겼다.

 

담배 피우는 무당


여인은 널따란 마호가니 탁자 위에 앨범을 내려놓곤 앉아 손가락처럼 하얗고 가느다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어느 새 가볍게 화장을 한 듯 입술연지를 바르고 반백의 머리카락을 틀어 올렸으며 옷은 편안한 상아빛 원피스 차림이었다.


“이게 내 인생이랄까?”


여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한 장 한 장 앨범을 넘겼다. 빛바랜 흑백사진 속엔 포대기에 싸인 갓난애부터 귀여운 어린 소녀, 어여쁘면서도 어딘지 슬퍼 보이는 사춘기, 한 송이 백합화 같은 검은 교복 속의 여고생 모습들이 들어 있었다. 독사진이 많았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찍은 자리에서도 유독 돋보였다. 장미꽃마냥 활짝 핀 몇몇 미인들보다 오히려 더 고혹적이었다. 그 무렵부터는 대부분 컬러 사진이었다. 단발머리는 흑단 같은 긴 머리채로 변하고, 하얀 얼굴 속의 그윽한 눈과 입술이 무척 뇌쇄적이었다.


추억에 잠겨 간혹 입가에 미소를 짓기도 하던 여인은 왠지 그때부터 긴 한숨이 섞인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페이지를 차츰 빨리 넘겼다. 담뱃재나 불똥이 떨어져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실제로 과거의 흔적인 듯 눌어붙은 비닐막, 담뱃불로 지진 성싶은 얼굴, 반쯤 잘라낸 양 어색한 구도와 포즈, 면도날로 신체 일부를 예리하게 도려내 버린 장면 따위가 얼핏얼핏 보였다. 점점 더 빨리 넘겼기 때문에 마치 파노라마 만화경을 보는 것만 같았다. 여인은 갑자기 진저리를 치며 앨범을 탁 닫아 버렸다.


“원래는…천천히 보여드리면서…쌉쌀한 인생 운명의 쌍곡선과 희비애락에 대해서도 얘기해 볼까 싶었는데…호호, 그래봤자 다 부질없는 짓이지 뭘….”


여인은 소파 속에 고양이처럼 웅크리곤 손등으로 볼을 괸 채 담배를 피웠다. 담배 피는 무당이 생소해선지 사내는 벽 중앙의 초상화로 슬쩍 눈을 돌렸다.

 

<다음 호에는 ‘의혹의 눈’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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