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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과 지옥은 꼭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

"어쩌면 살아서 경험하는 곳이 극락과 지옥일지도 모릅니다"

김덕권 시인 l 기사입력 2018-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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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권 시인     ©브레이크뉴스

‘극락(極樂)과 지옥(地獄)’은 어느 곳에 있으며 그 곳은 어떤 곳일까요? 극락과 지옥은 주로 종교에서 쓰는 말입니다. 그 극락을 불교에서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로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말합니다.


그리고 지옥은 불가(佛家)에서는 현실에서 악한 일을 한 사람이 죽어서 간다고 하는 세계를 말하고, 기독교와 천주교에서는 큰 죄를 짓고 죽은 사람이 그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악마와 함께 영원히 벌을 받는다고 하는 곳을 말하지요.


그런데 ‘지옥’이 없다면 ‘극락’도 존재할 수 없고, ‘극락’이 존재한다면 ‘지옥’도 당연히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제 생각으로는 극락과 지옥은 꼭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살아서 경험하는 곳이 극락과 지옥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육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기도 하고 고통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만일 ‘육신’이 없다면 어떻게 기쁨을 누리며 어떻게 고통을 느낄까요? 불교에서 극락은 부처가 계시는 깨끗한 국토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청정토(淸淨土) · 청정불찰(淸淨佛刹) · 정찰(淨刹) · 정계(淨界) · 묘토(妙土) · 불찰(佛刹) · 불국(佛國)이라고도 하지요. 그러니까 이 모든 표현이 넓은 의미에서는 부처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중생들의 세계는 번뇌(煩惱)와 더러움이 가득한 예토(濊土)라고 합니다. 그에 반하여 부처의 세계는 깨끗하고 번뇌로부터 떠나 있기 때문에 정토라 하는 것이지요. 정토에 대하여는 실재로 이 세계를 떠난 곳에 부처의 세계가 따로 존재한다고 보는 견해와 마음의 청정함이 곧 정토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옥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있습니다. <구사론(俱舍論)> 등에 나오는 팔열지옥(八熱地獄)과 팔한지옥(八寒地獄), 그리고 그 각각에 다시 16개의 작은 지옥이 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목련경(木蓮經)》에는 그 외에도 칼산지옥, 목욕지옥, 피못지옥, 독사지옥 등등 소름끼치는 온갖 지옥들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런 지옥에는 염라대왕이 수많은 명관(冥官)들을 거느리고 있고 그 수하에 옥리들인 우두나찰과 마두나찰들이 있어서 죄지은 자들의 눈깔을 도려내고 혀를 뽑아낸다고 하네요!


그럼 원불교에서 보는 극락과 지옥관은 어떤 것일까요? 소태산(少太山) 부처님께서《대종경(大宗經)》<변의품(辨疑品)>에 극락과 지옥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 마음이 죄 복(罪福)과 고락(苦樂)을 초월한 자리에 그쳐 있으면 그 자리가 곧 극락이요, 죄 복과 고락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 자리가 곧 지옥이니라.」또 여쭈었습니다.「어찌하여야 길이 극락생활만 하고 지옥에 떨어지지 아니하오리까.」「성품(性品)의 이치를 오득(悟得)하여 마음이 항상 자성(自性)을 떠나지 아니하면 길이 극락생활을 하게 되고 지옥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또한 과학자들은 극락과 지옥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과학자들이 큰 물통에 여러 마리의 쥐를 넣은 후, 뚜껑을 닫고 완전히 빛을 차단했습니다. 그러자 통속에 갇힌 쥐들은 평균 3분 만에 헤엄치기를 포기하고 죽어버렸다고 합니다. 그 다음 실험에서는 모든 조건을 동일하게 하되 희미한 빛이 통 안에 스며들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쥐들은 평균 36시간 이상을 헤엄치며 살아있었다고 합니다. 어둠 속에 갇힌 쥐는 금방 살려는 노력을 포기한 것이지요.


그러나 한줄기 빛에서 희망을 품은 쥐들은 750배나 오랜 시간동안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낸 것입니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천국의 열쇠’라는 책을 쓴 미국 작가 A. J 크로닌은 “지옥이란 희망을 잃어버린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희망이 없으면 삶은 지옥으로 바뀌지만, 희망이 있는 한 삶은 극락이 될 수 있다는 논리지요.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암흑과도 같은 절망적인 상황을 희망의 힘으로 이겨낸 위인들의 사례를 여럿 찾아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링컨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링컨 스스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걷는 길은 험하고 미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미끄러져 길바닥 위에 넘어지곤 했다. 그러나 나는 괜찮아. 길이 약간 미끄럽긴 해도 낭떠러지는 아니야.” 거듭되는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링컨은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비관적인 상황일수록 오히려 스스로의 마음에 희망의 메시지를 주입했던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도 죽어 가 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극락과 지옥은 바로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한 선승(禪僧)에게 어느 날 권세 있는 무사가 찾아왔습니다.


“극락과 지옥의 차이를 가르쳐 주십시오.” 노승은 퍽이나 마땅찮은 표정으로 답했습니다. “그거야 말해 줄 수야 있네만, 자네에게 그것을 이해할 만한 머리가 있는지 모르겠네.” 무사는 애써 분을 삭이며 말했습니다. “무례하오. 당신이 지금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지 알고 있소?” 목소리에 노여움이 묻어났지만 노승은 깔보는 태도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 자네는 어리석어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네.” 무사는 분에 못 이겨 몸을 떨었습니다. 그럴수록 노승은 한층 더 놀리는 투로 말했습니다. “허리춤에 찬 것은 검이라 부르는 물건인가? 음식을 자르는 칼처럼 보잘 것 없어 보이는군.” “뭣이라!” 무사에게 그 이상의 모욕은 없었습니다.


당장 칼을 뽑아 목을 칠 기세로 검을 잡는 순간, 노승이 말했습니다. “그게 지옥이라네.” 무사의 얼굴에 깨달음이 스쳤습니다. ‘스스로 다스릴 수 없는 마음이 곧 지옥이로구나.’ 무사가 조용히 칼집에 칼을 꽂자 노승이 다시 입을 열었지요. “그게 바로 극락일세.”


그러니까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없을 때가 <지옥>이고,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때가 <극락>이 아닌가요? ‘행복하다. 불행하다, 좋다. 싫다,’ 이런 것 모두가 마음의 문제입니다. 내 마음을 내가 다스릴 수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공부가 모든 수행의 으뜸입니다. 마음공부란 우리가 경계(境界)를 당할 때 마음을 요란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리석지 않게 하고 그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극락과 지옥은 우리가 죄 복과 고락을 초월하면 찾아오는 마음의 상태가 아닐까요!

 

duksan403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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