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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再讀新書 人物論[10]

손권은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실리주의자

글/이정랑(중국고전 평론가) l 기사입력 2020-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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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웅들과의 경쟁에 살아남아…창조적이며 관리 능통한 지도자
유연한 리더십 덕분에 능수능란했던 통합의 지도자로 급부상


19세부터 71세까지 국가 경영…조조·유비와 차별화된 리더십
통합 위한 방법으로, ‘내가 말하기’보다 ‘남의 말을 듣기’ 실천

 

열아홉에 2대째 군주가 돼서 무려 50여 년을 창업(創業)과 수성(守成)에 성공한 사람이 바로 오나라의 손권(孫權, 182~252)이다. 우리는 그를 조조나 유비의 반열에 올리는 것을 주저하고 있지만, 그것은 손권에 대한 인물 탐구가 부족해서가 아닐까 한다. 그는 안으로 여러 부서의 분열과 갈등, 그리고 이질적인 요소를 통합하며 밖으로는 많은 군웅들과의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수성에 성공한 창조적이며 관리에 능통한 지도자였다.

 

▲ 조조의 대군을 물리치기 위해 반드시 화공(火攻) 전략를 써야만 하는 유비와 손권 연합군. 사진은 영화 '적벽대전 2부-최후의 결전' 한 장면. 

 

19세에 오나라 영도자 등극


삼국시대의 세 주역은 분명 조조·유비·손권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우리는 손권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 심지어 관심 정도가 제갈량·사마의만도 못한 게 사실이다. 분명 손권은 칼날같이 맞붙은 위·촉·오 중에서 오나라의 창업과 수성을 이어가고 오나라를 90여 년간 유지시켰던 초석을 마련한 당대의 영웅이었다.


손권은 조조보다 27세, 유비보다는 21세가 어리다. 조조와 유비가 창업 당사자인 것에 비해 손권은 형인 손책(孫策, 175~200)의 왕위를 이어받았다는 사실 역시 그의 영웅으로서의 풍모가 떨어지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손권은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수많은 영웅호걸이 탄생하고 소멸하는 신화와 같은 전쟁과 생사를 건 혈투가 난무하고, 내로라 하는 책사들이 활약했던 삼국시대를 헤쳐 나온 풍운아다.


손권은 대권을 쥔 시기가 다른 이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그는 10대인 19세에 오나라의 영도자가 되었다. 지금 고3 나이로 대국의 임금이 된 것이다. 조조는 40세에 천하에 이름을 떨쳤고 유비는 50세에 겨우 작은 성 하나를 차지하여 기반을 마련했으며, 비교적 젊었다는 제갈량이 28세에 유비의 삼고초려로 세상에 출사한 것에 비하면 얼마나 어린 나이인지 알 수 있다.


그렇게 오나라의 최고 책임자가 되어 71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무려 50여 년 동안 한 국가를 경영한 그에게서 조조나 유비가 갖지 못한 차별화된 ‘통합’의 리더십을 발견할 수 있다.


손권의 아버지인 손견(孫堅, 156~192)은 강동의 영웅이었다. 일찍이 황건적의 난을 평정하며 이름을 떨쳤고 동탁 토벌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일어나 원술과 한편이 되었다. 그의 무공이 뛰어나고 전공이 쌓이자 공을 시기한 원술이 군량미를 대주지 않아 곤경에 빠진 일이 있을 정도로 영웅들의 견제 대상이기도 했다.

 

사열식 치르고 왕위 계승


병법과 리더십이 탁월했던 손견은 원술의 종용으로 형주 땅의 주인인 유표와 맞붙었다. 그 와중에 유표의 부하인 황조와 전투 중 황조의 부하가 쏜 화살에 맞아 그만 전사하고 만다. 그의 나이 불과 36세 때다.


손견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중 장남인 손책이 아버지의 지위를 이어받았지만 원술의 지나친 견제를 받았다. 그러다 아버지의 병사 1000명을 원술에게 받아 강남으로 향했다. 마침 원술이 제위에 오르려 하자 손책은 원술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조조와 연을 맺는다.


강남 땅에는 손씨 가문과 우호적인 가문이 많아 손책은 그곳에서 후일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주변을 정복해 오군의 허공을 죽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이 화를 불러들였다.


허공의 문객으로 있던 세 명의 자객이 손책이 사냥하는 곳에 매복해 있다가 손책에게 화살을 쏘았고 그 하나가 손책의 이마에 명중했다. 손책은 소생하지 못하고 자신이 살아날 가망이 없음을 알자 핵심 참모인 장소를 불러 자신의 후계자로 동생인 손권을 임명하겠다고 유언을 남긴다.


장소는 손견의 세 번째 아들인 손익(孫翊, 184~204)을 후계자로 삼자고 청했지만, 손책은 “세를 확장해서 넓히고 전쟁터를 누비는 것은 내가 낫지만 안에서 살림을 하면서 나라를 굳건히 지키는 능력은 사실 동생 손권이 한 수 위였다”라며 손권에 대한 그간의 믿음을 드러냈다.


이때 손책은 26세였고 손권의 나이는 불과 19세였다. 허망하게도 손견의 가문은 영웅 2대가 요절하는 비운을 맞은 것이다. 황망하게 울고만 있던 손권은 장소의 큰 소리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군대를 모아 사열식을 치르고 왕위에 오른다.

 

나이 어려도 성품·자질 훌륭


손권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태산이었다. 손책의 죽음을 기회로 여긴 외부 세력이 강남 땅을 호시탐탐 노리기 시작한 것은 다음 문제였다. 더 큰 문제는 내부에 있었다. 핵심 장소마저 자신보다 동생인 손익이 후계자로 더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제대로 영을 세울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게다가 당시 오나라는 여러 세력의 집단 지도체제로 그들의 전폭적 지지를 얻지 못하는 한 왕으로의 역할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첫 번째 세력은 아버지 손견으로부터 손책·손권으로 이어지는 무사집단이고 두 번째는 중원의 귀족 출신으로 막대한 자금력을 가지고 있는 거부들의 연합체가 있었다. 이 집단의 수장은 노숙이었다. 또 다른 권력집단은 토호세력으로 육(陸)씨 등 네 성씨의 결합체였다.


이 중에서도 핵심 열쇠는 주유가 쥐고 있었다. 주유는 손책과는 동서지간이며 손권보다 일곱 살 위로 당시 오나라 지역에서는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실력자였다. 만약 그가 ‘내가 주인이 되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손권으로서도 별 방법이 없을 정도로 강남 땅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그러나 주유는 손권을 선택했다. 일단 손견·손책으로 이어져 내려온 충성심이 가장 큰 요인이었지만 무엇보다 손권이 어린 나이에 비해 성품과 자질이 뛰어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손권 또한 주유는 물론 자신의 왕위를 반대했던 장소까지 극진히 모셨다. 1세와 창업을 같이 시작한 공신들의 존재를 버겁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처세를 한 것이다.


이윽고 주유가 앞장서자 모든 일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주유가 앞장서서 권문세가인 노숙을 핵심 참모로 영입했고 육손으로 대표되는 토호거족들의 마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주유를 움직인 것은 물론 손권의 리더십이었다. 왕위에 오른 손권은 당장 급한 것이 ‘통합’이라고 생각했다. 이질적인 요소들이 결합한 집단일수록 ‘통합’을 통한 ‘결속’이 중요하다는 것을 19세 손권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손건은 통합을 위한 방법으로, ‘내가 말하기’보다 ‘남의 말을 듣기’로 결심했고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어떤 사안에 대해, 토론이 이루어지면 손권은 자기의 생각을 먼저 드러내지 않았다. 회의 석상에서 가장 높은 상사가 어떤 결론이나 방향을 말해버리면 누구도 그 의견을 뒤집을 제안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권은 자신이 말하고 참모들이 받아 적는 식의 ‘지시형 회의’ 대신 본인은 화두만 던져놓고 참모들이 격론을 벌이며 왁자지껄 토론으로 벌어지는 상황을 만들어내곤 했다. 시장바닥 같은 회의장 분위기는 서서히 하나의 방향으로 자리 잡히고 각기 다른 역할에 대한 이해도 또한 높아지게 했다. 이런 자유토론 분위기를 리드한 것은 ‘말 없는 손권’이었다.

 

‘말 없는 손권’의 존재감


손권의 두 번째 원칙은 결론이 난 사안을 재토론하는 것의 차단이었다. 충분한 토론 끝에 나온 결론을 놓고 또 다른 논쟁을 벌이는 것을 그는 낭비라고 생각했다. 일단 충분한 토론을 통해 결론이 나면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그 결과가 비록 좋지 않게 드러나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러자 모든 장수와 참모들은 적극적인 방법으로 최선·최고의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 열린 토론의 순기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적벽대전이다.


원소를 격파한 조조는 손권에게 편지를 띄운다. ‘내가 80만 대군을 몰고 그대에게 갈 것이니 같이 사냥이나 하자’는 내용으로, 그것은 일종의 항복요구서였다. 물론 조조군의 주목적은 유비였다. 쫓기다가 결국 손권에게까지 몸을 의탁한 유비는 촉오 동맹을 제의하면서 함께 조조를 치자고 제안했다.


손권으로서는 유비의 편을 들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손권은 어차피 조조의 칼 끝이 유비를 관통한 후 자신을 향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문제를 놓고 손권은 회의를 소집했다.


장소를 포함한 다수의 장수가 조조에게 항복할 것을 권했다. 유일하게 주유만이 결전을 주장했다. 그러자 항복 일색의 회의장 분위기는 난상토론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손권의 결정이 필요한 때가 이르기 시작했다.


손권은 전투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 당시 오나라는 양자강을 경계로 위의 조조와 맞서고 있었다. 양자강은 그야말로 천혜의 방어진이었다. 더구나 조조군은 기마군단이었다. 험난한 양자강과 그 둘레에 있는 습지는 말이 통과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물론 조조군에도 수군이 있었지만, 손권으로서는 노숙이 제안했던 천하삼분지계의 전략을 위해서라도 전쟁이 필요했다.


결심을 굳힌 손권은 칼을 빼어 책상 모서리를 내리쳤다. “결정했다. 앞으로 조조에게 항복하자는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내 칼에 먼저 베임을 당할 것이다!”라고 소리쳤다. 그의 결단력과 위엄이 함께 돋보이는 장면이다.

 

<다음 호에도 ‘손권의 인물론’이 이어집니다>

 

j643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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