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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권 세태풍자 소설 ‘불 꺼진 무인등대’ 제2부 <10> 벌레

“난 인간이 아니라 짐승보다 못한 누추한 벌레”

글/김영권(소설가) l 기사입력 2020-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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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빙자 도둑놈 사기꾼 모리배들을 싸그리 없앴으면 좋겠어”
“그들이 분에 넘치게 누리는 특권을 국민이 회수해 버린다면…”
“협잡꾼들은 서서히 사라지고 참다운 민주시대가 오지 않을까?”

 

▲ 국회 사무처에서 국회의원 금배지를 공개한 모습. <뉴시스> 

 

Q가 그 사진가 사내를 알게 된 건 2여 년 전 도서관에서였다.


집에서 가깝고 산 아래 자리 잡아 점심 식사 후 산책할 겸 들러 신문을 훑어보고 가끔 작은 보물을 찾은 기분으로 책 한 권쯤 빌려 오기도 했다.


어느 겨울날, 귀가하려던 그는 정수기 쪽으로 다가가다가 인접한 자판기 앞에 선 사람이 허리를 구부린 채 커피를 뽑는 사이 반코트 주머니에서 허연 호빵 하나가 떨어져 내리는 걸 보곤 겨우 받아 건네었다. 과공비례라지만 너무 고마워하는 모습엔 진실성이 느껴졌다. 그 빵과 커피는 그 사람의 한 끼니 점심 식사용 음식이었다. 그 후로 이따금 마주치면 자판기 차를 뽑아 홀짝거리며 이런저런 인생담을 나누곤 했던 것이다.

 

“카메라는 내 심장 같은 녀석”


“형, 요즘 어때? 재미가 좋아?…세상 돌아가는 꼴이 대체 어떤 것 같아, 응?”


나이 차가 무척 많은데도 그는 늘 형이라고 호칭했다.


“저야 뭐 늘 비슷하지만, 세상은 요지경 속 파노라마처럼 기기묘묘하게 돌아가잖아요. 구경만 하고 있는 게 미안스럴 지경인걸요.


사내의 물음에 Q는 시큰둥히 대꾸했다.


“형, 난 말야…요즘 좀더 구체적으로 이상스러움을 실감하고 있어. 신문이나 책을 보다가 문득 활자들이 야릇한 뿔 달린 곤충으로 변해 내 얼굴로 기어 오르기도 하고 귓가에 붕붕거리며 정치가 나리들의 말을 대신 전해 주기도 해. 그건 마치 요정들의 종알거림처럼 이상향을 꿈꾸게 해줘. 신문지 위의 글자를 해독하지도 못하면서…그리고 정치꾼들의 사진이 불현듯 머리만 검은 사마귀 괴물로 변신해 가지곤, 뇌수부터 시작해 온 육신을 갉아 쪽쪽 빨아 먹는 거야.”


그는 자신의 혀를 핥았다.


“환상이나 환청 등도 일종의 개성미를 반영하기 땜에 함부로 말해선 안 되겠지만…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건 사실인 모양이더군요. 삭막한 세상의 생존경쟁이 빚어낸 비극이랄까요. 저 또한 간혹 시달릴 때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당사자 스스로 지옥의 형벌인 양 괴로워하면서도 그 비실재적 현상을 즐긴다는 거죠. 선택된 자에게만 주어진 초현실로 여기는 사람도 있고, 외계인 친구가 보내는 신호라고 짐작한다거나, 심지어 개성적이며 예술적인 고상스런 실패자의 도피처로 여겨 은근히 즐긴다더군요.”


“흐흐…그럴지도 모르지.”


사내는 술잔을 들어 음미하듯 천천히 들이키곤 말을 이었다.


“하지만, 흐흐…도피처라기보단 유형지라고 생각하며 적응하려 미친 척 발버둥쳐 본다고 해야겠지.”


“그렇겠죠. 아무튼 지지 말고 그걸 창조적으로 활용해서 조만간 기발한 작품을 보여주시면 좋겠어요.”


“그래야겠지.”


왕년의 사진작가는 술잔을 든 채 파르르 떨리는 자신의 손을 가만히 응시하며 한숨을 내쉬더니 쭉 들이켰다.


“도둑맞은 카메라는 찾으셨나요?”


“작정하고 누가 가져간 건데…카메라 녀석이 탈출해서 제 발로 걸어오지 않는 한 가망없지 뭘.”


“혹시 팔아서 술 드신 건 아니겠죠? 하하, 언젠가처럼….”


“그건 작고 구식이지만 내 심장 같은 녀석이었는걸.”


사내는 괴롭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요즘은 좀 뜸하시더군요. 궁금했어요.”


“흐흐, 먹고 살아야 하니까. 카메라도 마련해야 하구…그래서 요즘 구청에서 시행하는 극빈자 구호 근로사업에 나가 일하고 있다우. 설렁설렁 하니 뭐 별루 힘들진 않아.”


“몽타주 작업은 잘 진행되고 있나요?”


“어차피 하루 아침에 승부 볼 일은 아니니까 꾸준히 자료를 모아야지 뭘. 현실 자료에 효모인 몽상을 살짝 섞어 발효시키는 한편 손떨림 기법의 고도화로써 새로운 독창성을 이끌어내야 하니까. 흐흐….”

 

“정치 협잡꾼 싹 사라져야”


그 사내가 오래전부터 도서관 정기간행물실에 앉아 하는 작업은 각종 신문과 잡지를 훑어보다가 (물질이 아닌 자기 마음의 눈에) 포착된 사진들을 골라 복사하는 것이었다. 그걸 집으로 가져가 영적인 통찰을 주는 장면들을 오려 붙여 바탕으로 삼곤 그 위에 자신의 다양한 손떨림 기법 사진을 환상적으로 몽타주해 신창작을 한다는 얘기였다. Q가 궁금해 했으나 사내는 아직 한 번도 그 작품을 보여주지 않았다. 언젠가, 그 언젠가 꽃필 날만 기약하며….


“간혹 슬쩍 보여주신 복사물은 대부분 인물 사진이더군요?”


“온갖 인간들의 눈만 모아 몽타주하든지…또는 코, 입술, 귀 따위만 따로 배치해 보면 어떨까 싶어. 흐흣….”


“인물 중에서도 정치가라는 사람들이 반 이상 차지하던데요?”


“그중에 또 99퍼센트는 정치 빙자 도둑놈 사기꾼 모리배란 사실은 형도 알지?”


“헉, 그렇게까지 많다면….”


“놈들을 싸그리 다 없애 버렸으면 좋겠어!”


“그럼 민주주의가….”


“흠, 만약 그놈들을 때려 처죽이는 게 아니라, 그들이 분에 넘치게 누리고 있는 특권을 모두 주권자인 국민이 회수해 버린다면…그땐 아마 협잡꾼들은 서서히 사라지고 참다운 민주시대가 오지 않을까?”


“물론 좋죠. 하지만 아직은 정치가에 대한 의존감이 심한 편이라서…국민의 각성이 10프로, 30프로, 50프로를 넘어 현재 60프로를 향해 어렵게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국민의 80프로가 의존심에서 벗어나 선전 선동을 무시하고 주인의 눈으로 일꾼을 뽑을 수 있다면 아마 좋은 정치 머슴들이 많이 나오지 않을까요?”


“그런 날을 위하여 건배!”


사내는 얼굴 가득 굵은 주름살을 지으며 짐짓 낙관적인 미소를 띄웠다.


“부인께서는 아직…?”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Q는 조심스레 물었다.


“음, 이제 곧 나올 거야. 그동안의 긴 기다림에 비하면…석 달쯤은 도리어 기쁨으로 회향할 수도 있을 것 같어.”

 

“난 짐승보다 못한 벌레”


현재 교도소에 갇힌 신세인 그 부인은…외동딸을 납치해 외딴섬의 별장에 감금한 불한당 놈을 겨우 찾아낸 끝에, 결혼을 승낙한다며 유인하여 절벽 아래로 밀어 죽인 죄로 징역 5년형을 받았다.(착실히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던 딸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피의자는 법정에서, 자신은 그 당시 분노와 증오심보다 공포감과 불안에 사로잡힌 나머지 제정신이 아니었으며, 피해자를 절벽 끝으로 유인하거나 밀어 떨어뜨릴 정신도 힘도 없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악귀 같은 놈이 실족사한 건 천벌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검사는, 심신 건장하던 젊은 남자가 그런 긴박한 위기의 순간에 굳이 스스로 벼랑 끝으로 가서 걷다가 실족한다는 건 가당찮으니만큼 필경 교묘한 계략에 의한 살인이라 논박했다. 저 에덴동산에서처럼 그 무인도에도 뱀과 두 사람밖에 없었기에 살인 범죄자는 명약관화하다고 열변을 토했다.


경험이 별로 없어 보이는 젊은 변호사는 나름 세심히 반론을 폈다. 즉, 사망자는 국내 유수 재벌이자 권력자의 외아들로서, 평소에도 안하무인에 오만방자하고 겁이 없었다. 특히 그 무인도 별장에서는 마치 몽상 왕국의 황태자처럼 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남의 딸을 납치 감금 폭행하고도 무슨 시혜라도 베푼 양 의기양양했다.


또한 당시 그 자는 이기적인 망상에 빠진 채 나르시시즘과 유사한 로맨틱한 감정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익숙한 길일지라도(아니, 그렇기에 오히려 더 쉽게) 자멸의 벼랑 끝으로 걸어갈 수 있었으리라는 얘기였다.


판사는, 충분히 정상참작이 되나마, 특정한 무인도에서 일정한 피해자가 일정한 피의자를 만나 특정한 시간 내에 죽었음을 강조하며 판결문을 중얼거렸다.


“문제는 아내가…출소가 가까워지는데도 그다지 즐거움이나 희망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야. 마치 우울증에 걸린 사람 같아 보여. 하긴 어찌 기쁨이나 희망 따윌 느낄 수가 있겠어? 차라리 억울하다고 울화통을 터트려 줬으면 좋을 지경이구먼. 출소 후엔 또 어찌 살아가야 할지…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난 인간이 아니라 짐승보다 못한 누추한 벌레야.”
사내는 한숨과 함께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사람이 모이면 힘이 생긴다잖아요. 더구나 부부지간이니 음양 화합하면 전혀 예상치 못한 신비로운 기운이 샘솟을지 누가 알겠어요?”


“형을 만나면 이래서 기분이 좋다니까. 말 한마디로 나쁜 기운을 바꿔 버리는 그런 마술은 대체 어디서 배웠수, 응?”


“무슨 말씀을…전 도리어 천 선생님을 만나 뵈면 마음이 편안해지는걸요.”


“형, 무슨 그런 괴상쩍은 말을….”


“아닙니다. 천 선생님은 스스로 무책임한 벌레라고 비하하지만, 그런 허심탄회한 방하착(放下着) 속에서 저는 현대인의 지나친 자의식이나 아집을 반성하게 됩니다.”


“허 참, 점입가경이로군. 흐흣…형, 언제 한번 우리 와이프를 만나 마음이 따스해지는 얘길 좀 해주슈.”


“기회가 되면 그러죠 뭐.”


“우리 불쌍스런 딸애도 역시 한번 만나 주시고….”


“예, 그러도록 하겠습니다…그런데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서른 살이나 연륜 차이가 나니만큼, 이젠 형이라고 부르지 마시죠.”


“만일 형이 정 부담스럽다면 고쳐야겠지. 하지만 난 괜찮은걸…음, 사실 형을 보고 있으면 말야, 덧없이 흘러가 버린 청춘 시절이 그리워…그래서 현실은 누추한 늙마로되 마음이나마 꿈을 간직하고 싶어 괜히 허풍을 떨어 보는 거지 뭘. 흐흐….”


“그럼 그냥 편하게 하세요. 저도 가끔 길을 가다 예쁘고 호리호리한 여학생을 만나면 문득 누나라고 부르고 싶어질 때가 있으니까요.”


“하핫, 친누나가 예쁘고 정이 많았던가 보군.”


“후훗, 첫사랑 소녀였어요.”


“응? 그런데 왜…?”


“한 살 연상의 여고생이었거든요.”


“하하….”


둘은 소리내어 웃고 나서 건배하곤 술을 쭉 들이켰다.


<다음 호에는 ‘화투 예술’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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