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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권 세태풍자 소설 ‘불 꺼진 무인등대’ 제2부 <8> 노청춘의 추억

“작두신 내리면 마음이 달뜨고 발바닥은 근질근질”

글/김영권(소설가) l 기사입력 202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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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퍼런 작두날이 신령님 애정처럼 느껴져 자연스레 그 위로…
요즘 대부분의 무당은 삼류 연예인이나 사이비 마술사와 비슷

 

▲ 낮에는 박수무당, 밤에는 건달의 투잡족이 되어버린 광호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박수건달’ 한 장면. 

 

그는 다시 길을 걸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그는 투덜거렸다.


“이 세상은 인격신이 아닌 자연의 운행에 의해 돌아간다고 믿고 싶으면서도…저런 개같잖은 년놈들을 보면…현세의 삶과 죽음으로 모든 것이 그냥 싹 끝나는 게 아니라, 내세에 개돼지나 뱀 따위로 환생해 처절한 반성의 기회를 갖게 했으면 좋겠어. 남한테 해악을 끼친 것만큼. 만일 현실 세계의 법이 선을 옹호하고 악을 징벌해 준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반대니까 말야. 아마 짐승이나 곤충들이 혁명을 일으켜 인간을 몰아낸다면 훨씬 평화로운 지구에 신의 영광이 빛날 텐데….”

 

38선보다 더 살벌한 분열


한동안 가자 시장 입구가 나타났다. 그는 자석에 끌리듯 그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시장은 도시 속의 오아시스라고 할 수 있을는가. 굳이 예전에만 그랬고 요즘은 사막이나 마찬가지라고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 실상을 살피면 옛날이나 요즘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강변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세상 인심이 변한 딱 그만큼 시장 인정도 변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변할 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진 않는다. 10년 전에도 시장판에서 티격태격은 있었고 20년 전에도 각박하다며 욕을 퍼붓는 아줌마들은 보였을 것이며 아마 50년 전에도….


시장엔 여전히 서민들이 많이 드나들고 상인들 또한 대부분 잘살기를 꿈꾸는 서민들이기에 작은 오아시스라고 해도 거짓은 아니리라.


인간이 적응력 강한 존재라곤 하지만 너무 과장하면 안 된다. 사실은 지구상에서 가장 연약한, 풀꽃보다 더 여린 존재인지 모른다. 그러기에 시속에 편승해 거창스럽고 번지레한 대기업체의 시멘트 아울렛을 선호할지언정…그중엔 좁은 시장 길에서 흙내음을 맡고 싶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한번 따져 보고 시장으로 돌아가자. 겉으론 어떨지 몰라도 인간의 적응력은 결코 벌레나 미생물보다 대단치 않다. 그저 구시대의 착각 혹은 낭설일 뿐….


월남전이나 최근 이라크전에 투입되었던 수많은 미군들의 경우는 제쳐두고, 고추딜·된장 먹어 꽤나 독종이며 적응력이 강하다고 자부하는 한국인만 살펴봐도 그게 허구라는 걸 알 수 있다.


6·25 동족상잔 체험자나 월남 파병 군인들이 간혹 겉으론 큰소리치면서도 속으로 곪는 트라우마에 시달려 광기에 사로잡히거나 이중·다중 인격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북파공작 전문 특수부대원 혹은 5·18 광주 시민항쟁에 투입됐던 공수대원들 중엔 죄책감과 허무의식을 동반한 우울증 때문에 알코올 중독자가 돼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과연 적응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원래 그 말(인간의 적응력)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시베리아의 오지 수용소에서 체험하거나 직접 보고 들은 불우한 민중 죄수들의 참혹상을 기록한 <죽음의 집>인지 하는 소설 속에 나오는 언질이 아닌가 싶다. 무수한 죄수가 강제노동에 시달리다가 죽어 갔으나 살아남은 사람도 있기에 그런 얘기가 나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죽은 사람들은? 그들을 과연 벼룩한 마리보다 더 적응력이 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


더구나 요즘 한국 사회의 20~30대 청년 또는 40~50대 장년들은 자기 땅에서마저 제대로 적응해 살아가지 못한 나머지 자살률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지 않은가?


역사적인 위기 상황에서 시시각각 색깔을 바꾸며 살아남은 인간 카멜레온과 제 몸뚱이를 반토막 잘라 버린 도마뱀들은 국가의 중요한 고비마다 나서서 제 색깔과 반 몸뚱이를 찾아내 달라며 울부짖곤 한다. 그리고 자신의 정신분열증을 이 나라에 투영하여 사회 분열을 조장한다. 수구 꼴통과 종북 좌파들은 건강한 보수와 진보를 비웃으며 어제도 오늘도 사리사욕을 탐해 38선보다 더 살벌한 분열을 획책한다.

 

무당을 비판하는 무당


시장통은 북적거리지도 한산하지도 않은 편이었다. 행인은 많았지만 가게 앞에 멈춰 흥정하는 사람은 그닥 없었다.


그는 떡집과 과일점 등을 지나 시장 안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한쪽에 일종의 목로주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는 좀 한갓진 앵두나무집의 좌판 앞으로 가 앉았다.


주모 아줌마는 설거지를 하고 있다가 그가 주문을 하자 손을 털곤 막걸리를 꺼내 놓았다. 낙지볶음이 만들어지는 동안 그는 하얀 사발에 술을 부어 한 모금 쭉 마시곤 갓김치를 집어 음미하며 씹었다. 그러면서 다른 목로집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거나 한창 얘기에 빠진 사람들을 둘러보며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음, 갈증이 싹 가시는군. 아스팔트 길을 오래 걸어서 그런지 여긴 정말 오아시스 같아. 물론 잠시 잠깐이겠지만…아, 옛날 옛적 호랭이 담배 피우던 시절엔 무당의 말이 왕의 권력보다 더 고급스러웠다던데…차츰 하강해 민중의 부모이자 카운셀러가 되었다가…요즘은 아예 금전에 맛들려 해악을 끼치는 존재가 되었으니…그들은 과연 내세에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 궁금하군. 이곳의 분위기 때문인지 몰라도, 차라리 저 주모 아줌마들이 참된 무당처럼 느껴지는 건 그저 환상일 따름일까…신령의 자비를 받들어 고난에 빠진 사람들을 위안해 주기보다 공포감을 주입해 돈을 빼먹는 것들은 이미 무당이 아닌 사악스런 괴물이야.’


그는 술을 한잔 쭉 들이켜곤 낙지보다는 다시 갓김치를 집어 천천히 씹었다.


‘음, 유튜브를 보니 무당을 비판하는 무당이 나오더군. 하긴 뭐 그런 곳을 통해 인기를 모아 보려는 반거충이의 수작일 수도 있겠지. 그 자칭 까발리기 무당에 따르면, 점을 치거나 굿을 할 때 무당들은 신령이 내렸음을 증험하기 위해 쌀알 붙이기, 숟가락 세우기, 삼지창에 돼지 세우기, 그리고 가장 극적인 작두타기를 하는데…그게 다 신령의 능력이 아니라 트릭일 뿐이라더군. 그러고는 직접 실연해 보였어…매끈매끈한 꽹과리 표면에 쌀알을 휙 뿌렸는데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는 건 신비스럽지만, 사실은 미리 물수건으로 슬쩍 닦아 놓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다는 얘기지.


 쟁반 위에 숟가락 세우기 또한 유리겔라의 마술처럼 일견 신기스러운데, 알고 보면 미리 흩어 둔 쌀알을 슬그머니 모아 잘 이용한 균형 잡기로서, 충분한 연습만 하면 초등학생도 가능했으며…삼지창 신묘기 또한 꽤 고난도이긴 하지만 그 비밀은 절묘한 균형 역학이지 무슨 신령님의 조화가 아님을 실험해 보이더군.


마지막으로 작두 타기는 그 까발리기 무당도 꽤 조심하긴 했어. 발이 썩둑 잘려 버릴 위험이 있으니까. 실험용 작두날은 어쨌든 사과와 배가 슥슥 잘릴 정도로 날카롭긴 했지. 무녀는 양옆에 세워진 장대를 잡고 조심스레 작두날 위로 올라서더니, 잠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요즘 대부분의 무당은 삼류 연예인이나 사이비 마술사와 비슷하니 속으면 안 된다고 말했어.

 

그 순간, 비명 소리와 함께 작두날 위의 한쪽 발이 썩둑 잘리며 검붉은 피가 솟아나는 게 아닌지 불안스러웠으나…무녀는 다시 회심의 미소를 짓곤, 신을 내세운 협잡질과 사기에 속지 말고 자기 마음속에 잠들어 계신 신령님을 깨워 착하게 살라고 강조하더구먼. 발바닥을 들어 보이는데 상처는 전혀 없고 눌린 자국만 살짝 났더군. 장대를 잘 활용한다는 얘기였지.


음…그런데 바로 다음날, 작두꽃이란 현역 무당의 이름으로 울분에 찬 반론 동영상이 올라왔지. 그녀는 날이 시퍼렇게 벼려진 진짜 무쇠 작두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흔들며, 까발리기 무녀가 탄 작두는 평범한 얼치기들을 위해 만든 맞춤식으로서 비유하자면 아이들의 장난감일 뿐이라고 비웃더군.

 

그리고 신령이 내리지도 않았는데 작두 위에 올라서는 짓 따위는 신명을 우롱하는 장난이라며 꾸짖었지. 진짜 작두 신령님이 내리고 신명이 오르면 마음이 달뜨고 날아갈 듯 가벼워지며 발바닥이 근질근질해진다는 거야. 그리고 시퍼런 작두날이 신령님의 애정처럼 느껴져 자연스레 그 위에 오르게 된다는 얘기였지. 그리하여 나비처럼 사뿐사뿐 저절로 춤도 추고….


무녀가 보여주는 무쇠 작두의 날은 정말 잘 벼려져 종잇장이 슬슬 베여 날아가더군.


만일 그걸 직접 타 보였다면 까발리기 무당의 작두는 사실 어린애 장난감처럼 여겨졌겠지만,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궁금증은 여전히 남았지. 어느 쪽이 진실인지 알 수도 없었고…어느 한쪽만 진실이고 다른 쪽은 허위라고 얘기하긴 어려웠어.

 

문득 반반씩 섞여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 단순히 진실과 허위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과 합리성의 대립이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들고…물론 한쪽을 버리는 게 아니라 상생적 지양을 해야겠지. 무지몽매한 미신과 인간 위주의 설익은 자만심을 함께 버리고, 진정한 자리이타의 목적을 찾아야 해. 목적이 저급하면 수단 방법도 열등해질 수밖에…화정 여사에게 한번 물어볼 걸 그랬나. 암튼 물과 불을 비롯해 자연이 그렇듯 스스로 잘 정화하여 미래엔 진선미를 포용한 무화(巫花)로 꽃피어야 할 텐데….’


<다음 호에는 ‘마왕과 코미디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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