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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권 세태풍자 소설 ‘불 꺼진 무인등대’ 제1부 <8> 이면도로

서로 닮아가는 개와 차, 그리고 인간에 관한 단상

글/김영권(소설가) l 기사입력 2020-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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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애마와 애견, 때때로 타인의 행복할 권리 박살 낼 수도
타다가 버린 중고차와 북한산 떠돌이 개가 복수를 꿈꾸는지도

 

개나 자동차가 주인인 인간을 닮는다는 얘기는 동서고금 통설
요즘은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애견과 애마를 닮아가는 모양새

 

대한민국 땅 위에서 가장 못났다고 자기비하를 일삼는 Q는 생각한다.


‘길을 가다 보면 개새끼들과 차량들이 참으로 많이 눈에 띈다. 사람이 안 보일 정도다. 흐흐…. 한국 사회가 산천이 수십 번 바뀔 정도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만큼 변화했다지만, 가장 예사롭지 않은 건 이것(개와 차)이 아닌가 싶다. 특히 애완견과 자가용….’


사실, 개와 차는 네 발 또는 네 바퀴를 가졌다는 점에서 인간에겐 만만스러우면서도 친숙하고 유사한 존재다. 그뿐이랴. 눈도 있고 입도 있으며 내장도 있고 똥구멍까지 다 갖추었다. 차 뒤꽁무니에 개와 비슷한 꼬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상상력이 쬐끔 풍부하다고 자부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살랑살랑 흔들고 반짝반짝 빛나지만 언제 어느 새 당신을 죽음 속으로 끌고 들어갈지 모른다.


그럼에도 사람은 현재 왕이나 대통령처럼 권력을 갖고 지배욕을 부릴 수 있다는 사실에 웃음짓는다. 애마와 애견, 즉 개와 차에 대해 마치 신과 같은 무한대의 사랑이나 힘을 행사하고 또 향유할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건 진실과는 상관없는 일종의 도착된 자존감과 자기애에 불과할지도 모르므로 위험하다.


그 위험은 교통사고나 맹견 습격 사건으로 곧잘 나타난다. 일종의 반란이라고나 할까. 당신은 애견과 애마의 항명을 곧장 브레이크로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미 당신의 의식과 습관 따위가 그들 속에 들어가 그네들의 습성과 섞어 버렸으므로 좀처럼 그러기 어렵다.


만일 술이라도 한잔 마신다면 금상첨화 상태가 온다. 당신의 애마와 애견(광마와 광견)은 목숨 줄을 물고 흔들어 당신의 더러운 착각과 신뢰를 끝장낼 뿐만 아니라 타인의 행복할 권리마저 박살 내게 된다. 당신이 타다가 버린 중고차와 북한산의 떠돌이 개들은 남몰래 눈을 번쩍이며 복수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 몇 해 전 한 집회현장에 애완견이 현수막을 두른 채 등장해 화제를 모았다. <뉴시스> 

 

개는 대부분 주인을 닮는다


혹자는 업보설을 들먹이기도 한다. 설령 도사견한테 물려 중상을 입거나 벤츠에 치여 죽더라도, 그건 전생 또는 과거의 악행에 대한 갚음이므로 너무 억울하게 생각지 말고 오히려 고맙게 받아들이라는 얘기다. 즉, 참회와 성찰은 전화위복이 된다는 말씀….


물론 자기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책임을 지는 건 현대 사회에 꼭 필요한 모럴이리라. 행복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신의 섭리나 예수님과 부처님의 진리가 고귀할지언정, 한 고비 과거의 죄악을 넘어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전생에까지 삶의 입김을 불어넣어야 한다면…차라리 포기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싶다. 이른바 현대인의 자존심으로.


더구나 그 대상이 동족인 사람도 아니고 개나 차라면 오묘한 섭리의 틀을 벗어나 복수하고 싶으리라. 결정적으로, 현재 한국 사회처럼 진실과 허위, 선과 악, 미와 추가 혼동될뿐더러 나아가 뒤집힌 현실에서는 업보설이든 운명론이든 뭐든 킬킬 비웃을 수도 있으리라.


3대가 계속 천인공노할 악업을 저지르고도 떵떵거리며 살고, 신의 진리와 인간의 진실과 세상의 평화를 위해 한 목숨 바친 사람들은 여전히 지옥 속에 살아야 한다면 일단정지가 필요한 성싶다.


Q는 팔을 들어 소매로 입을 가려 매연을 막으며 중얼거린다.


‘특히 요즘 들어 간간이 업보설을 주창하는 허본좌라는 자칭 신인(神人)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니, 실은 본좌보다는 추종자라는 자들이 더 거세게 인신이라고 부르짖지만…슬그머니 슬슬 사이비 종교 쪽으로 기울어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 그러지 마시고 계속 웃겨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건만….’


좁직한 골목길인데도 차들이 무슨 악머구리처럼 잔뜩 몰려 빵빵거리며 곡예를 부리는 판이라 사람이 다니기가 쉽지 않다. 까딱하다간 발밑에 밟혀 사라지는 개미 신세가 될 수도 있겠다. 수많은 강철 갑충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틈새로 인간은 덜떨어진 나무 인형처럼 주춤거릴 수밖에 없다.


‘이건 뭔가 아주 잘못돼 있어. 차라리 이 한국 땅을 차와 개로 다 채워 버리면 어떨까? 모두 다 찌부러져 비명을 지르도록…아악, 살려 줘!…말장난 같지만, 아악(我樂)은 아악(我惡)이 될 수도 있다.’


사실, 차량 사고도 그렇지만 개가 사람을 물어 중상을 입히거나 사망케 하는 일도 사람 탓이 훨씬 크다.


모든 국민이 대통령을 닮진 않지만, 대부분의 개는 주인을 본받는다고 할 수 있다. 권력과 먹이 앞에서 인간은 목숨을 걸고 비판하기도 하되, 개는 간혹 그러는 척하다가도 순종 맹종 굴종을 넘어 인신 우러러보기를 하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에서도 인신 숭앙이 꽤 많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아무래도 개보다는 못한 실정이다.


한국은 보신탕 음식 문화가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설령 토종 똥개가 아니더라도 처음부터 개지랄을 칠 순 없다. 견종이나 성질에 따라 개답게 잘 교육시킨다면 대부분 말귀를 알아듣고 순응하리라. 그들이 도덕군자가 될 순 없을지라도 견격(犬格)은 갖춘 존재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기초적인 인격(人格)조차 갖추지 못한 게 우리 사회의 실상이므로 개 교육 훈련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도리어…솔직히 말하면, 견공이 사람을 교육시켜야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런 상황이 되면 개와 사람의 격이 뒤집어진다.


마침내 인격과 견격이 마주 선 셈이다.

개는 긴가민가하면서도 서서히 주인보다 자기가 더 훌륭하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저 비루먹은 개보다 못한 사람 새끼!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속아지는 비루하단 얘기지 뭐. 아무리 인권 만능의 세상이라지만 저딴 건 견권 아래에 두었으면 좋겠어. 흐흥, 하긴 이 세상에 개와 사람이 1:1로 마주보고 있다면 우리가 정복해 버릴 수가 있지. 크흐흥….’


하지만 영악한 개는 굳이 속을 드러내지 않는다. 슬슬 복종하는 척하면서 인간이란 족속을 맘속으로부터 조종해 가족의 한가운데 슬그머니 들어앉는 것이다. 마치 연가시가 숙주인 곤충의 뱃속에 들어가 또아리를 틀 듯이….


그쯤 되고 보면 ‘삐요~ 삐요~’ 하고 머리 한구석에서 혹 비상 신호가 울려도 별로 소용없다. 가족의 상좌(上座)는 물심양면으로 애완견이 차지하는 장면이 일일연속극처럼 벌어진다. 그건 결코 우습지 않고 엽기적인 상황인데도 본인들은 브라운관에 비친 일개 드라마를 보듯 예사롭다.


메리나 예삐의 잘못은 아니다. 사실 걔들은 개로서 개답게 생활하지 못한 채 인간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비누거품의 ‘오색 빛 행복 우리’ 속에서 살아야 하므로 무척이나 고역일지도 모른다. 제대로 연애도 못해 보고….

 

안방 아랫목에 들어앉은 개


요즘 한국 사람들은 개미든 모기든 바퀴벌레든 거미든 진드기든 보이는 족족 때려잡아 버린다. 자기네 집 안으로는 동족인 인간조차도 잘 들여놓지 않는다. 하긴 그만큼 삭막한 세상이니까. 그런데도 개를 선뜻 신성한 안방의 문지방 안으로 수용한 건 과장 없이 한민족 역사상 경천동지할 일이 아닐까 싶다.


문제는 그에 따르는 아무런 에티켓이 없다는 점이다. 싸가지가 없다는 게 더 정확할지 모른다. 아니, 이건 단순히 에티켓이나 예절의 문제는 아닌 성싶다.


한국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개를 애완한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은 개의 (육체적 실용성이 아니라) 정신적 실용성을 잘 알고 있었다. 개인주의에 빠진(자기 자신도 물론 그렇지만) 동족인 인간에게 열 받고 지친 마음을 개(또는 자기를 닮은 멋진 자가용 차)를 통해 풀고 위안받았던 것이리라.

 

아마 그래서 일찍부터 수간(獸姦)과 폭주 테러 따위가 성행했는지도 모른다. 정신이나 영혼이 교류하게 되면 아마 외모를 떠나 서로 동일시하게 되고 애정을 느낄 테니까. 그렇게 극단적으로까지 가진 않더라도 외로운 자기애를 개와 차에 투사하고, 불평불만을 그들을 상대로 뇌까리지 않겠는가.


과연 개나 차가 한 인간의 살짝 도착된 심리를 동족인 사람만큼 제대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저 의식주를 마련해 주는 대가로 알랑방귀를 뀌며 그런 척하는 건 아닐까?


물론 참인격을 지닌 사람과 잘 교육받은 개가 함께 시공간을 영유하며 제자리를 지키면서 종족을 떠난 순수한 정(情)을 나누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살벌한 세태…가족끼리도 모종의 적이 되어 잡아먹는 시대엔 불안스럽다. 언제 어느 새 사람 혹은 개의 성격이 돌연변이해 폭발할지 모른다. 예전에 파편화되어 가던 냉랭한 가정에서 라디오나 TV 드라마가 성긴 대화를 대신해 줬다면, 요즘은 안방 아랫목에 들어앉은 개가 그런 역을 슬그머니 맡아 하지 않는가 싶다. 자신의 애완견을 때렸다고 남편을 칼로 찔러 죽인 여자는 어쩜 자기가 드라마의 주인공이라고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태초에 늑대의 젖을 빨아먹고 자란 서양 신화의 자손들과 달리 한국 사람들은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개를 문지방 안으로 잘 들이지 않았다. 아무리 귀엽더라도 개는 개, 사람은 사람으로서 공간을 배정한 것이다. 그리고 제 아무리 귀한 애완견일지언정 놈이 방문객을 향해 욕설하듯 짖어대거나 깨물어 상처를 입힐 경우 차라리 개를 꾸짖었지 사람을 직접 탓하진 않았다.

 

▲ 요르단 암만의 한 애완동물 위탁소에 강아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굳이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터이다.


아파트에 살기 때문에 어렵느니 어쩌니 하지만 변명에 불과할 뿐이다. 왜냐? 지금 이 시대,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는 다름 아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완견이든 애마든 마찬가지다. 설령 개가 1천만 마리가 넘든 자가용이 2천만 대가 넘든 어쨌든 그것들이 남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면 그 누가 뭐라 하랴?


하지만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라면 모르지만 일반인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현실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되 남에게도 조금쯤 기쁨을 나눠 줄 만한 아량을 지녀야 하는데…그래야만 자기 쾌락도 더 커질 수 있는데…설령 사회가 무척 각박 삭막하다 하더라도 보리쌀 한 알만큼이나마 이기주의가 아니라 이타를 생각해야 하는데….


개를 키우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로 애견을 견애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 견인, 인견하는 상황도 많다. 즉, 사람이 개인지 개가 사람인지 모르는 상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개가 사람을 닮고 사람이 개를 닮는다고도 할 수 있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게 되겠지만, 그들은 상당히 주관적인 면이 강한 기질이다. 이게 한국인의 특징인 유별난 가족주의와 감정성, 다혈질 그리고 서양(특히 미국)에서 빌어온 개인주의 따위와 섞이고 보면 개도 인간도 신마저도 이해하기 곤란한 신자유주의 속 신(新) 카오스를 헤매는 엽기적인 개인간 성격[캐릭터]이 탄생하는 것이다.


개인 혹은 개인간 캐릭터는 자신의 쾌락만 추구할 뿐 타인의 행복을 무시하거나 파괴한다는 점이 무섭다. 그들은 자기 개와 차가 사람에게 덤벼들어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거나 사망케 하더라도 산술 계산으로 처리하고 만다. 즉, 몇 원의 금액이 생명 값으로 환산돼 보험금으로 지급되면 대충 끝나는 셈이다. 물론 형사처벌을 받기도 하지만 인권 선진국에 비하면 새발의 피일 뿐….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 자신의 꿈과 욕망과 생명은 끔찍이도 아낀다. 경제학에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도 있지만, 날강도 같은 악인들이 선량하고 귀한 인간의 생명을 쓰레기통 속으로 차 던져 버리는 경우도 적잖을 터이다.


개를 개로서 사랑하지 못하고 인간 자신의 한 소유물로 여길 때 사실상 개의 실존은 인간의 발에 차여 쓰레기통 속으로 내버려졌다. 그리고 빈 심장 속에 의식주를 제공해 주는 사람의 사상(思想)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왜곡된…개는 서서히 마음속에 싹트는 광기를 숨긴 채 인간 가족 속에 적응해 가는 척한다. 잠재의식 밑에서나마 이빨을 빠득빠득 갈며….


인간의 아기처럼 모든 짐승의 새끼들은 다 어여쁘다. 강아지, 병아리, 송아지, 고슴도치, 늑대, 여우, 호랑이…아가들은 모두 예쁘고 귀엽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고 또 사람마다 견해차가 있겠으나, 우선 순진무구함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강아지는 조상 대대로 복종의 원죄가 있어 사람의 손을 빨아주지만 아직은 설령 깨물고 제멋대로 굴어도 꽤나 깜찍스럽다. 하지만 유년 시절은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다.


라이온이나 하이에나, 늑대, 고슴도치 같은 야생동물의 새끼는 엄마 품을 떠나 자립해 먹고 살기 위해 대자연의 엄혹한 상황을 배운다. 실패하면 바로 죽음이다.


그런데 강아지는 전혀 다른 입장에 놓이게 된다. 선조님들처럼 인간에게 복종하며 그럭저럭 편안히 살 것이냐, 혹은 개로서의 본능과 실존에 충실하며 사람에게 저항하다가 맞아죽을 것인가? 아예 도망쳐서 방랑견이 되거나 북한산 같은 곳으로 숨어들어 수양에 몰두하여 견자[見者]가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강아지는 조상님의 지혜에 따라 인간의 법(진리)에 따르게 된다. 그것도 보편 민주적인 법이 아닌 특정한 개인의 독재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닮아가는 개, 차, 사람


요즘도 인간 세상(특히 한국)엔 좋은 독재와 나쁜 독재가 선택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이상야릇하게도 나쁜 독재를 북한 김정은의 짓거리나 대한민국의 중도 혹은 진보 민주주의와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김영삼·김대중 이후의 사회를 나쁜 민주주의라고 개탄하며 전두환과 박정희의 좋은 독재 시절로 돌아가고픈 향수에 젖어 있다.


그런 사람들 또한 개를 많이 키운다. 그들은 자기 개를 마치 자비로운 독재자가 국민을 다루듯이 한다. 자칭 민주주의자라고 하더라도 개를 꼭 자유롭게 키우는 건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 민주와 자유는 개의 주권인 견주(犬主)와 자유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아집이나 몽상이다. 과대망상에 빠진 어떤 자는 진화(進化)의 오묘함을 내세우며 자기는 인신(人神)이 되고 개로 하여금 견인(犬人)이 되게 해서 아파트라는 좁은 공간을 무대로 삼류 부조리극을 연기하는지도 모른다.


반신(半神), 반인(半人), 반견(半犬)이라는 존재가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다. 사람의 상상이 빚어낸 기괴한 존재가 동서고금의 신화나 설화 속에 등장하긴 하지만 정녕 2020년 한국의 현실에서도 살아 숨쉴 수 있을까?(미안스럽게도, 언뜻 북한의 왕자가 떠오를 뿐이다. 그리고 이어 남한의 감방 속 공주…) 대체 그들은 어떻게 이 좁은 한반도에서 그렇게 될 수 있었는가? 혹시 국민이 개라서…반인·반견이라서 그런 걸까? 도무지 믿기 힘든 현실이다. 아마 그렇지 않으리라. 분명 우리가 잘 모르는 무슨 이유가 있을 터이다.


아무튼 정신이 약간 이상스러워 뵈는 인간을 쳐다보며 고민하던 개는 슬쩍 미친 척하며 같이 어울린다. 그렇다고 광견이 되어 버린 건 아니고 공수병 같은 인간 혐오증 바이러스를 속에 숨긴 채 개답잖게 웃어주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자신이 마치 신이라도 된 듯 깊디깊은 심호흡을 하며 자존을 느낀다. 개가 속으로 무시하고 경멸하는 줄도 모른 채….


개나 차가 주인인 인간을 닮는다는 얘기는 동서고금의 통설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추세를 넘어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애견과 애마를 닮아가는 모양새다. 사람 아기보다 강아지를 더 사랑스러워하고, 남편이나 아내보다 애견을 더 소중히 여기다가 싸워 서로 죽이는 얄궂고 특이한 시대다. 나쁜 개는 없다지만, 사람이 스스로 인간성을 개차반으로 여기는 한 견공들은 점점 더 괴이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다음 호에는 ‘화정’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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