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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권 세태풍자 소설 ‘불 꺼진 무인등대’ <5> 대긍정론

엄혹한 법치주의 세상에서 왜 개는 수많은 사람 괴롭히나?

글/김영권(소설가) l 기사입력 2020-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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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란스런 세상 살아가려면 웬만한 소음 따윈 넘어가야지’
인간 족속은 왜 시덥잖은 짓에 소중한 에너지 낭비하는 걸까?

 

배고파 라면 하나 훔치고 감옥 가는 세상에서 왜 개는 면책특권?
개 소음 방지법 제정하는 데 민주시민 납득 못 할 애로사항 있나?

 

문득 Q는 눈을 내리감곤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 좋은 아침 시간을 하찮은 생각으로 허비해야 하다니…만일 저 자그마한 개 한 마리만 없다면 새벽부터 아침은 신비로운 우주에 대한 명상과 찬미의 귀한 시간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음, 아니지. 개보다는 저 이기주의자 애견녀가 사라져야만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해. 개는 또 구입하면 되니까. 어찌하면 저 파렴치한 괴녀를 처치해 버릴 수 있을까?


그동안 여러 차례 쪽지를 붙여 놓거나 직접 찾아가 호소해 봤지만, 입에 발린 약속음, 우선 배척하려고만 애쓰지 말고 마음을 열어 수용성을 키워야 해. 좀 억지 춘향 격이긴 하되 개소리에도 분명 고마운 점은 있어. 나태에 빠지지 않게 늘 긴장시켜 주거든. 미꾸라지통 속에 메기를 한 마리 넣어두면 녀석들이 훨씬 생기롭게 오래 산다잖아.

 

어쨌든 자신을 강화시키는 계기로 삼아 보는 거야. 약간 능글맞은 태도를 지니는 것도 진흙탕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기술이겠지. 너무 맑은 물엔 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속담도 있으니 말야. 도를 닦는 마음으로 고통을 견디고 삶의 희로애락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 보는 것 또한 진리에 다가가는 가시밭길이 아닐까? 설령 도통[道通]까진 못하더라도 불평불만만 뇌까리기보다는 가치로운 시간이 되지 않겠는가?…

 

▲<사진출처=Pixabay> 

 

나쁜 주인 닮아가는 견공


실상 견주의 불찰로 인해 무수한 악마견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얼마나 많은 의견(義犬)이나 천사견들이 자라나고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강아지 때부터 나쁜 주인이든 좋은 주인이든 가리지 않은 채 혀로 핥고 꼬리치며 얼마나 다정다감 귀여운가! 인간의 외로움과 고뇌를 조용히 위안해 주고, 주인이 위험에 처하면 목숨 걸고 구출하기도 하며, 맹인을 안내해 주는 맹도견은 영혼의 빛을 지닌 듯 거룩해 보이기조차 한다…하지만 아무리 천진스런 강아지라도 이기적인 주인을 잘못 만나면 저도 모르는 새 물이 들어 악견으로 변질되고 마는 거지. 위층의 스피츠 놈처럼….


하지만 지금은 억지로라도 장점을 생각해 보자구. 음, 뭐가 있을까?…그래, 저놈의 왈왈대는 소리를 이렇게 한번 번역해 보고 싶군…캉! 지하방에 사는 게으른 인간아, 부디 각성하여 앙칼지게 노력해서 지상층으로 올라와 밝은 햇빛을 받고 살거라. 캉!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네 마음속에 궁핍의 귀신이 또아릴 틀고 박혀 있어 그러느니라! 왈왈…음, 그런데 이런 서글픈 방법보다 더 바람직스런 해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야. 이를테면 이 공동주택에 사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악적 해충을 몰아내 버리는 것이지. 그러면 만사형통일 텐데, 다만 실행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문제야.

 

얼핏 보기엔 간단한 문제인 듯싶건만 결코 만만치가 않아. 건물은 공동주택이지만 공동체 정신은 전혀 없는 것 같아. 아니, 요즘 세상엔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것만 해도 열렬한 공동체 의식이라 할 법하니만큼…단지 그저 이해관계의 경중 문제라고나 할까.


1층집에서 일으키는 소음에 대해 바로 위쪽인 2층집에서는 별 불편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야. 70대 노부부가 젊은 손자와 함께 살고 있는데 아마 동지로 끌어들이기는 어려울 것 같아. 노인네들은 귀가 살짝 먹었고, 손자는 무슨 일이든 히히 웃으며 성낼 줄 모르는 정신지체 장애자기 때문이지. 노인네들 자신이 언제든 미국에 사는 아들 내외가 부르는 즉시 떠나기 위해 영어회화 카세트를 틀어 놓고 늘 중얼중얼하기 때문에 개소리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는 셈이랄까….


3층엔 본좌 가주가 살고 있지. 오랜 셋방살이 끝에 자수성가한 입지전적인 인물.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면서도 오로지 집 한 채를 갖기 위해 분투노력한 위인. 마침내 돈을 모아 집터를 마련한 뒤 스스로 진두지휘한 결과 이 주택을 건축했단다. 문자 그대로 자수성가라 강조하면서. 원래는 모두 셋방으로 내주었는데 5년쯤 전부터 1층과 2층은 팔고 현재는 지하층과 옥탑방만 자기 휘하에 있다고 했었지.

 

언젠가 한번 다른 일로 방문한 김에 슬쩍 말을 꺼냈더니, 그 본좌 가주는 허허 웃으며 담담한 목소리로, 좀 이해하고 살든지 정 힘들면 좋은 데 옮겨가라더군. 그가 결코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만약 위층 거주인이 지하층의 소음 탓에 불편해한다면 당장 어떤 조처를 취할 수도 있겠으되 그 반대 상황일 경우 별 도리도 권리도 없다고 중얼댈 땐 속상해서 한숨이 나오더군.


마침 그때 옥탑방에 사는 무명 연극배우가 내려오기에 마당까지 따라 내려가 고민을 토로했더니 빙긋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지. 그리고 복화술하듯 얘기했어…자기와 현실생활 문제를 논의하려 하지 말라. 현실의 선악 카르마를 초월해 그 실존적 희비극을 조망하여 보여주는 게 배우의 운명이리니. 나뭇가지에 둥지 튼 새가 인간처럼 두 채, 세 채 욕심껏 집을 마련해 두고 수십 년 동안 얽매여 사는 것을 보았는가? 언제든 훨훨 날아갈 수 없다면 새도 배우도 만물 영장도 아니지…그러더니 입을 열어 말하더군.

 

후훗, 형씨, 너무 그리 신경쓰지 마시우. 지나고 보면 고통이 더 아름답지 않겠수? 무대 위에서 죽음을 앞둔 인간의 연기를 하노라면 때론 생의 본질과 헛껍데기가 홀연 느껴지기도 하더구먼. 후후, 이런 얘기하면 짜증날지 모르겠으나…사실상 옥탑에선 아래층의 소음이 잘 들리지도 않을뿐더러 설령 개놈이 컹컹 짖더라도 방해되기보다…오히려 마치 먼 뱃고동이나 기적 소리인 양 아련히 향수를 자극한다는 아이러니지.

 

그런데 간혹 3층 주인 영감이 옥상에 올라와 역기와 아령을 들며 헐떡거리는 건 뭐 좋은데, 불현듯 새마을 노래나 국민교육헌장 따윌 흥얼거리면 정말 환장할 노릇이더군…후훗, 그래서 때때로 감정이입을 해 지하층 거주자의 고충을 홀로 연기해 보기도 하죠. 그럼 굿바이….

 

도대체 인간족속은 왜?


새처럼 날아가는 그 배우를 보노라니 문득 고독감이 전신을 휩싸더군. 아, 마치 외딴 무인도에 홀홀단신 고립된 느낌이었지. 흠, 무엇보다 의아스러운 건 콘크리트 벽 하나를 사이에 둔 바로 옆 지하층의 동향이야.

 

지층 좌측과 우측 방 위쪽에 1층집이 올라서 있으니만큼 가장 가까운 동변상련의 이웃 공동체인 셈인데, 똑같은 개소리에 대하여 전혀 반응이 다른 거야. 비유하자면 마치 남한과 북한 사람들처럼…아니, 아예 반응 자체가 없이 늘 조용하기만 했어. 같은 처지인데 왜 이리 다를까? 가끔 왠지 조금쯤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 너그러움과 인내심을 좀 길러 봐. 이 소란스런 세상에 살아가려면 웬만한 소음 따윈 단무지 먹듯 넘어가야지, 안 그래?…

 

지층 좌측 방엔 팔이 하나 없는 50대 중반의 사내가 혼자 사는데 자칭 대긍정론자더군. 아마 생활보호대상자로서 최소한의 의식주로 겨우 살아가는 듯싶었어. 어느 날 한번 내려가 개 소음에 대해 물었더니 자기 대머리를 찰싹 치곤 반문했었지.


‘당신과 나 중에서 과연 누가 더 행복할까?’


‘글쎄요.’


‘물론 당신이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겠지.’


‘….’


‘아마 그럴 거야. 흐흐, 객관적으로 누가 봐도 그럴 테니까…흐흐, 젊은 청춘 시절은 좋아. 왜? 다시 올 수 없으니 더 아련한 거야. 하지만 냉정히 현실을 따져 보자구. 청춘은 무분별하게 고통과 고뇌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시기랄까? 그것도 자기 자신이 창조적으로 뭘 추구하다가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 남을 모방하려다가 씁쓸한 꼴을 당하기 십상이지. 제 능력에 맞춰 안분자족하기보다 과욕을 부리다가 패가망신하는 청춘이 어디 한둘일까.

 

한 가지만 예를 들자면, 좋은 남자 좋은 여자 만나 진실한 행복을 추구하긴 좀 아쉽다는 듯 카사노바와 측천무후 흉내를 내며 처녀 한 다스니 총각 두 다스니 후려 따먹는 걸 생의 목표로 삼는 청춘 남녀가 많다는 얘기야.

 

물론 일종의 비유지만, 그런 허황된 가짜 꿈이 의식 밑에서 거품을 내며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지. 취업이나 취미 생활 등 다른 면에서도 모방은 유사해. 나중에 속았다고 한탄해 봤자 누추한 청춘의 잔해만 남았을 뿐 보상해 줄 사람은 없어. 자, 어떤가? 흐흐, 당신은 자기 청춘의 미래를 알 수 없지만 난 이미 내 청춘의 환상과 환멸을 속속들이 알고 있거든.’


‘청춘의 특권은 불확실성과 위험 속에서도 꿈과 가능성을 향해 미지의 검푸른 바다를 항해할 수 있다는 게 아닐까요? 그렇기에 젊은 노인도 있고 늙은 청년도 있는 셈이겠죠.’


‘흐흐, 직접 겪어 보면 실상을 뼈저리도록 깨닫게 되지. 일부분의 인간은 새로운 섬 상륙에 성공하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바다에 빠져 짜디짠 헛물이나 켜다가 나자빠질 거야. 문제는 그 대다수 청춘의 신대륙 탐험이 사실은 과장 광고된 천재와 영웅의 모방에 불과하다는 점이지. 그들은 자책감에 빠져 자살하기도 하고, 청춘의 에너지를 괴물한테 거의 빼앗겨 버린 채 구대륙의 소모품이 될 뿐이야.

 

내 결론은…청년은 결코 중년 또는 노인을 향해 잘난 척 비웃음을 날릴 처지가 아니라는 얘기지. 오히려 노인의 분별심으로부터 배워 차근차근 자기 능력껏 실속을 차리는 게 순리라는 말씀이랄까. 모든 동물뿐 아니라 식물조차 그 순리를 따르는데, 도대체 인간 족속은 왜 시덥잖은 짓에 소중한 에너지를 낭비하는 걸까?

 

심지어 잘난 선진국 사람들조차 이른바 청춘의 반항을 인정하는 동시에 노년의 분별심을 귀중히 여기는데, 왜 동방예의지국이라 자칭하는 한국에서는 청년의 이상도 노인의 현명한 지혜도 망가지고 훼손당하고 변질돼 버리는 것일까, 응?…’


‘혹시…한쪽 팔을 청년 시절에 잃어버린 건 아닌지요? 그래서 다른 아저씨들보다 청춘에 대해 더 애증 어린 집착을 품고 계신 건 아닌지….’


‘흐흐, 한창 젊을 때 비밀 임무를 수행하다가 외팔이 신세가 되긴 했지. 북파공작원을 알랑가 몰라. 놀랄 것 없어. 남파간첩이 있듯 북파간첩도 존재하는 거지 뭐. 국가를 위한 일이라는 명목으로 젊은이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놈들이나 속여서 끌고 가는 놈들이나 가증스럽긴 마찬가지야. 어쨌든 중요한 건 나 스스로의 발로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는 사실인 셈이지. 터무니없는 일확천금의 유혹에 속아 넘어간 내 청춘의 죄인걸 뭐…습기 찬 이 지하 골방이 내 무덤이 될지도 몰라. 그대는 한창 꽃피는 시절이라 모르겠지만, 난 가끔 군사분계선을 넘던 그 순간처럼 절박스런 심정에 숨을 헐떡거리곤 해…이럴 바엔 차라리 자살해 버리자! 그 절박감 속엔 삶의 짜릿한 쾌미가 깃들어 있기도 하거든. 찰나의 요술이라고나 할까.

 

자, 이제 개소리에 대한 내 의견을 밝히겠네. 개새끼가 미친 듯 짖어대면 당연히 시끄럽고 짜증나지. 하지만 존재하는 것엔 모두 다 의미가 있다는 생각 때문에…내가 굳이 선뜻 나서서 가타부타 떠들고 싶진 않군. 때론 개의 소음이 이 팔의 통증을 경감케 하거나 쾌락으로 변화시켜 주기도 하니까. 아마 생의 막장 같은 골방 속에 들어박혀 몽상 망상과 유희하며 지내어 그런지도 몰라. 흐흐, 그럼 잘 가시게….’


닫힌 문 앞에 묵묵히 서 있다가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지. 문득 고독감이 엄습하더군.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는 기분으로 비틀거리며….

 

그래, 대긍정심 배워 보자


Q는 눈썹을 잔뜩 찡그린 채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냉장고 문을 열고 포도 한 송이를 꺼내 따 먹었다.


그는 아침은 주로 과일로 해결했다. 시장에 가까워 저녁답 귀가길에 홍시, 딸기, 귤, 사과, 배, 바나나, 복숭아 따윌 가끔씩 채집해 왔다. 감미롭고 시원한 맛, 신들의 음료라는 넥타보다 못할 게 없다. 신선을 흉내 내서가 아니라, 밥보다 간편하고 혼자라도 구차스럽지 않아서 좋다. 포도 한 알 속엔 신의 섭리, 하느님의 사랑, 부처님의 자비가 다 들어 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영혼보다 더욱 순수하고 그윽하게….

 

▲ <사진출처=Pixabay> 


그는 책상 앞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가능하면 좋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포도 한 알도 비바람을 이겨내고 자기 속에 하늘 햇빛과 땅 기운을 받아들여 숙성시켜서는 다른 생명에게 오묘한 영향과 감미를 선물하지 않는가. 일상생활의 어려움은 발효제라고 할 수도 있어. 증오와 울화는 남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독기로 물들여 썩혀 버릴 거야. 그래, 과일 나무의 대긍정심을 조금이나마 배워 보자….’


바로 그때 위층 개가 왈왈 캉캉 발악하듯 짖어댔다. 언제 베란다 창문을 열어 두었는지 개소리는 훨씬 커져 천둥 번개보다 더 날카롭게 귀청을 울렸다. 천둥 소리는 아무리 살벌하더라도 미리 우르르릉하고 슬쩍 예고한 다음 본격적으로 콰쾅거리기 때문에 잠시 준비할 겨를이 있으며, 큰 죄가 없다면 별로 놀랄 필요까진 없다.

 

그런데 인간의 나쁜 점만 닮아 반쯤 미친 성싶은 개는 기분 내키는 대로 막 짖어대기 때문에 도리어 마음 청정한 사람일수록 더 심장이 내려앉게 된다.


만약 심혈관 질환이 있는 사람이라면 뇌졸중이나 심장마비로 졸지에 쓰러져 죽을 수도 있다. 살인 아닌가? 사람은 고성방가를 하거나 배고파 라면 하나 훔치고도 감옥 가게 되는 엄혹스런 법치주의 세상에서 왜 개는 수많은 사람을 괴롭히건만 면책특권을 부여받고 있는가?

 

개 소음 방지법을 제정하는 데 민주시민이 납득하지 못할 어떤 애로사항이 있단 말일까. 그 법안을 처리하는 게 과연 대단히 심사숙고해야 할 만큼 새롭고 창조적인 일인가 말이다! 이미 우리가 존경하고 모방해 마지않는 미국을 비롯한 인권 선진국에서는 개와 사람의 권리와 의무를 합리적으로 잘 규정해 놓지 않았던가? 이웃에 피해를 주지 말라! 너무나 간단하다 보니 혹시 너무 잘나서 미개한 한국인은 알고도 너그러이 지나쳐 버린 걸까?


우둔스런 모방꾼들의 특징은 사리사욕을 취하는 데 정신이 팔려 그런지 몰라도, 아무튼 창작자와 작품의 본질은 등한시한 채 그들 스스로 침뱉어 버리는 추악스런 쓰레기만 애써 따라 하려고 지랄치다 못해 미치기도 한다. 한국의 하늘 땅에 시대착오적인 망령들이 날뛰는 이유다.

 

이건 꼭 개놈의 새끼만의 문제는 아닌 성싶다. 정치 경제계부터 시작해 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 똬리 틀고 앉은 견인(犬人) 혹은 인견(人犬)의 문제다. 그들이 즐겨 먹는 음식은 선진국 사람 또는 개들의 똥이다. 그들은 자신이 고상하고 귀중한 체하면서 똥개를 무시 경멸하다가 필요하면 돌변해 몸보신용으로 잡아먹는다.

 

한국사회는 극악스런 아수라도


각설하고, 요즘 시대에 개 소음으로 인해 피해 받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도시, 특히 서울의 주택가에서는 세입자보다 집 주인이 훨씬 애완견을 많이 기른다. 세입자의 개는 주인을 닮아 소심해져 크게 짖지 못하리라. 아니, 소심하다기보다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는 마음가짐을 배운다고나 할까. 그렇지 않으면 쫓겨나게 되거니와 요즘엔 아예 애완견 금지 각서를 써야만 입주 가능한 집도 있단다.


사랑마저 돈이 있어야 가능한 세상이다. 돈보다 에티켓이 먼저인 세상, 위선 아닌 참다운 인격과 견격(犬格)이 상호 조화로운 시대가 온다면, 하느님도 신도 부처님도 껄껄 웃을 터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는 금전만 풍부하면 집 안에 악마를 키울 수도 있고 가난하면 자기 심성마저 보존키 어려운 극악스런 아수라도다. 다른 건 제쳐두고 적어도 애완견 시비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한국 국회의원들은  육신만 여의도 극회의사당에 둔 채 속마음은 구중궁궐 같은 호화저택 안에 턱 버텨 앉아, 부조리한 생활고에 시달리는 일반 국민들의 번민을 보며 음흉스레 낄낄거리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개다. 나라와 국민의 미래를 생각하기보다 당리당략과 사리사욕에 빠져 컹컹대는 자들은 사람이 아니라 추상적인 의미의 견족이라고 불러도 좋을 터이다.


위층의 개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사람 발소리와 헛기침 소리가 나는데도 개를 제지하는 기색은 없었다.


Q는 이를 악물었다.


‘음, 마치 사람 애먹이려고 일부러 저렇게 놔두는 것 같군. 선진국같으면 경찰에 전화 한 통화로 신고해 간단히 해결될 텐데…아, 차라리 총기 소지가 합법화되면 좋겠어. 굳이 꼭 인견을 총살하지 않더라도, 공포탄 한 발로 혹시 경각심은 불러일으킬 순 있을 테니까 말야. 정신적 후진국에 산다는 게 이런 것일까? 도대체 왜 층간소음 단속법이 없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그는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독백을 하다가 무심결에 포도알을 하나 입술 새로 넣곤 지그시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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