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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태풍자 소설 ‘불 꺼진 무인등대’ <1> 프롤로그-달력 구걸하는 거지

“그 농협께서 달력 몇 부 값 아끼느라 고객 상대로 꼼수”

글/김영권(소설가) l 기사입력 2019-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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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 하나만…” 정중히 부탁하자 “손님은 우리 고객 아니라…”
큼지막한 안내문 “달력 받으려면 통장이나 카드 꼭 지참하셔야!”


폐지 줍는 노파의 해괴스런 얘기 “3월 초쯤 농협 앞에 갔더니…”
서민에게만 달력 인심 야박한 농민은행, 3월엔 수백 부 폐지로 버려
“금년도 달력 내버려진 걸 발견해 리어카에 주워 싣고 고물상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물건은 무엇일까?


돈, 집, 멋진 육체, 연인, 애완견, 고급차 등등…사람에 따라 아주 많을 터이다. 하지만 그건 일단 소유하게 되면 서서히 뇌리 속에서 중요성을 잃어 간다. 섹스의 황홀한 쾌락마저도 얼마 후엔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캘린더는 좀 다른 성싶다. 물론 지구상의 온 세계인에게 달력은 생활 필수품이지만, 특히 한국 사람에겐 단순한 날짜 편람 기구를 넘어 천지의 신령과 소통하는 지침이나 귀중한 매개체가 된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인들은 달력을 하나 선물받게 되면 천하를 얻은 기분까진 아니더라도 미래의 큰 복을 받은 듯 기뻐한다.


사실 그 속엔 근심 걱정도 들어 있다.


입춘, 청명, 곡우 등등…사시사철 24절기에 맞춰 살아가는 농어촌 사람들뿐만 아니라 도시인들 또한 캘린더에 240가지 이상의 절기를 붉은 펜으로 메모하며 생활한다. 결혼식, 장례식, 개업식, 돌잔치, 환갑잔치, 제사 등등 각종 경조사는 일생 동안 끝이 없이 이어진다. 달력은 붉은 표시로 가득 찬다. 오죽하면 한국인은 남의 경조사에 참석하느라 일생을 다 보낸다는 한숨 섞인 농담이 흘러나올까. 가능하다면 달력 자체를 아예 없애 버리고 자기 삶의 자유를 누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나중에 가서 쳐다보지 않을지언정 일단 어디로 가서든 캘린더 하나쯤은 얻어 척 걸어 놔야 하는 게 일상인의 도리이자 능력이다. 초능력자에겐 여기저기서 유명한 표식이 찍힌 고급품이 슬슬 저절로 들어오므로 흐뭇한 미소와 함께 여분을 주변에 나눠 주며 자존감을 향유하게 된다. 반면 달력 사냥에 실패한 정글 사회의 패배자들은 상실감과 자괴감을 짓씹을 수밖에 없다.


물론 요즘은 공짜로 얻기보다 팬시점이나 인터넷을 통해 마음에 드는 캘린더를 구입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추세라지만, 대중화되려면 아직 좀더 세월의 흐름을 기다려야 할 듯싶다.

 

▲ 아무리 공짜라곤 하지만 은행 같은 데서 달력을 하나 얻으려면 약간의 용기와 함께 겸연쩍음을 무릅쓸 만큼 평상심이 있어야 한다.   


‘가을바람이 차츰 서늘해지니 얼마 후면 또 전국적으로 캘린더 사냥철이 시작되겠군. 벌써부터 좀 걱정되네.’


Q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그러는 건 작년 초겨울에 당한 일 때문이었다.


아무리 공짜라곤 하지만 은행 같은 데서 달력을 하나 얻으려면 약간의 용기와 함께 겸연쩍음을 무릅쓸 만큼 평상심이 있어야 한다. 설령 거래은행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특별고객은 창구 직원이 웃으며 “혹시 캘린더 필요하세요?”라고 공손히 물어 보는데 일반 손님은 직접 미소지으며 부탁해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만약 없다고 대꾸하면 그 민망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저곳은 다른 시중은행보다 좀 인간적일 성싶은데 오히려 더 비인간적이야. 흥, 속이는 놈이 나쁜 건지 속는 놈이 우둔한 건지….’


그는 농협은행 앞을 지나가며 콧방귀를 뀌었다.


지난 해 말경 겨울바람이 점점 심해지던 날, 그는 자동출납기(ATM) 대신 창구 앞으로 가서 10만 원을 인출한 뒤 아가씨에게 달력 하나만 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그런데 의외의 말이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손님은 저희 은행 고객이 아니시라 드릴 수가 없습니다.”


“네? 혹시 농담인가요?”


“아닙니다. 저희 서울농협과 농협은행은 긴밀한 제휴는 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곳입니다.”


“아니, 마크는 같은 걸 쓰고 있으면서…아무튼 이웃 사촌이니 달력 하나쯤 줄 수 있잖아요.”


“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상부의 방침이라…농협은행으로 한번 가보시죠. 죄송합니다.”


뒤에 번호표를 든 사람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일어서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좀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농협은행으로 갔더니 출입문에 큼지막한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달력 배포 기간 12월15일~17일(3일간)
※통장이나 카드를 꼭 지참하셔야 합니다!

 

그는 안으로 들어서자 창구까지 갈 필요도 없이 안내역 직원에게 달력 얘길 꺼냈다.


“고객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죄송스럽게도 어제 날짜로 교부가 끝났습니다.”


“그래도 한 부쯤 얻을 수 있겠죠?”


“아니, 남은 분량이 없습니다. 내년엔 좀 일찍 오시길…….”


“알았으니 그만두세요.”


Q는 눈길을 돌려 은행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인간 군상을 잠시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섰다.


그가 NH농협에 계좌를 개설한 건 타의반 자의반에 의해서였다.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한 후 상금을 받기 위해서….

 

▲ 농협은행, 발전하는 건 좋은데 과연 누굴 위해 발전하는가? 또한 어떤 방식으로 성장 발전하는가? 농민과 농촌을 위해 과연 올바른 방법으로 노력하고 있는가?


사실 그는 몇 개 중앙 일간지에만 응모했었다. 농촌을 배경으로 해 오염된 자연 속에서 죽어가는 소와 사람에 대한 몇 편은 제외했는데 어떤 친구가 대신 투고한 것이었다. ‘원하던 것이 되지 않고 원하지 않던 것이 됐을 때 그 안타까운 아이러니 또는 묘미’를 느끼면서 시상식장에 갔다. 농협중앙회 건물은 도시의 복마전 혹은 바벨탑 같았다.


발전하는 건 좋은데 과연 누굴 위해 발전하는가? 또한 어떤 방식으로 성장 발전하는가? 농민과 농촌을 위해 과연 올바른 방법으로 노력하고 있는가?…그런 의혹이 살짝 들 정도였다.


그 무렵 공룡 농협에 대한 비판과 대수술론이 연일 신문지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농민들은 빚에 허덕이는데 농협중앙회 회장은 일반 시중은행장보다 더 많은 수십 억 원의 연봉과 활동비를 받아 흥청망청 쓴다는 힐난이었다. 그리고 여타 간부와 일반 직원들도 고생하는 농민을 위한 사업에 마음을 쓰기보다 온갖 명목으로 보너스 잔치에 희희낙락거린다는 얘기였다. 그게 다 농민들의 고혈을 짜낸 게 아니겠는가?


시상식장인 거대한 강당엔 양복으로 정장한 수백 명의 농협 관계자들이 착석해 있었는데, 실은 시상식 때문이 아니라 연초의 무슨 행사를 위해 모여든 모양이었다. 아무튼 높직한 단상 위에서 중앙회장은 상패를 건네며 기분 잡친다는 표정으로 시 당선자 Q를 지그시 째려보았다. 아마 양복 차림이 아닌 캐주얼한 복장에 수염을 슬쩍 기르고 있어 그런지도 몰랐다.


마치 소왕국의 군주인 양 위세를 떨던 그가 몇 달 후 자신의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한 쥐 대통령 앞에서 무릎까지 꿇은 채 술을 따르며 아부하는 모습을 본 Q는 실소를 머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회장은 퇴임할 때 상상을 초월하는 퇴직금을 받아 챙겨 유유히 사라짐으로써 다시 한 번 국민의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농협중앙회 측은 일언반구의 납득할 만한 해명도 없이 슬그머니 얼버무렸다.

 

그 농협께서 이번엔 달력 몇십 부 값을 아끼시느라고 고객을 상대로 꼼수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이왕 찍는 것 좀더 인쇄해 넉넉한 마음으로 나눠준다면 농촌 고향의 가치를 알리는 의미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얼마 후 Q는 더욱 황당하고 해괴스런 얘기를 듣게 되었다. 소망집의 단골인 폐지 줍는 노파에 의하면, 3월 초쯤 농협 앞에 수백 부의 금년도 달력이 내버려진 걸 발견해 리어카에 주워 싣곤 고물상으로 가져갔다는 것이었다. 고물상 영감도 술마시지 않은 맨정신인 상태에서 사실이라고 확인했었다.


폐기처분된 그 캘린더들은 아마 VIP 고객을 위해 숨겨둔 물건인지 모른다. 영업 목적상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Q는 달력 한 장 구걸하느라 고군분투하던 당시의 장면이 선연히 떠올라 목이 메이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비극적인 짓을 희극적으로 처리할까? 차라리 캘린더 자체를 아예 전부 없애 버리는 게 더 재미있지 않을까?…아, 맨정신으론 살아내기 힘든 위대한 대한민국, 부디 만수무강하길…….’


Q는 독백 끝에 속으로 흐흐 웃었다.


<다음 호에는 ‘애완견님 전성시대’가 이어집니다>

 

 

♦ 작가의 말


“소시민 생활전선 고민과 고통 들여다보고 싶다”

 

이름값(네임밸류)이 있어 작품의 질은 좋든 나쁘든 일정량이 고정독자에 의해 팔려나가는 것도 유쾌하겠지만, 무명작가가 고군분투하여 새로운 사람들과 첫 만남을 갖는 건 한결 가치롭고 아름다운 일이다.


탁월한 천재가 명작을 창조해내 선사하는 것도 멋지겠으나, 평범한 사람이 생활 전선에서 겪는 문제를 분석해 희비애락의 원인을 추출해 보는 것 또한 전혀 의미 없는 헛짓은 아닐 터이다. 고민과 고통은 삶의 진실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졸작품은 원래 소설을 지향한 게 아니었다. 독자들이 외면해 버린 서글픈 소설 형식을 벗어나 발길 닿는 대로 터벅터벅 걸어 차라리 미지의 황무지로 들어가고 싶었다…하지만 제 아무리 숲속에서 길을 잃은 채 헤매어 본들 당사자에겐 파천황의 위기일지 몰라도,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한갓 가소로운 방황에 불과할 듯싶기만 하다. 황룡까지 바라진 않았을지언정 뱀장어를 그리려다 미꾸라지조차 웃을 엉터리로 낙착되지 않았을까 의문이다.


사실상 애초의 포부는 원대했다. 사악스런 권력자들은 외면할 이 땅의 구절양장 길을 구비구비 넘고 끝까지 돌아 일종의 ‘사소한 대서사극’을 펼쳐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단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다. 미진하긴 해도 이쯤에서 잠시 바윗돌 위에 앉아 쉬며, 이제껏 걸어온 길이 과연 가치로운지, 앞으로 걸어갈 여로가 정녕 필요한지 한번 성찰해 봐야 하기 때문이다.

 

연신내에서 김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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