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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권의 장편소설 ‘몽키 하우스’ 제2부 <3> 무정 세월

“내 몸뚱이가 시체라 생각하며 하루하루 지옥같이 살았지”

글/김영권(소설가) l 기사입력 2019-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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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내들을 전쟁터 총알받이로 끌어모아 만주는 일본군 천지였지”
“강렬한 욕구와 위안이 뭐였겠어?” “조선 처녀들이 그들의 성 노리개”

 

“하루에도 수십 명씩… 마치 내 여윈 몸 위로 탱크가 지나가는 기분”
“우린 친일파와 일본경찰에 속아 강제로 끌려갔을 뿐, 돈은 무슨 돈!”

 

▲ 1943년, 천진난만한 열네 살 정민(강하나)은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 손에 이끌려 가족의 품을 떠난다. 사진은 영화 ‘귀향’ 한 장면.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섣달 그믐날 밤, 클럽 일을 마친 청운은 피에로와 함께 백발 할매가 하는 희망집에 들렀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인데 낡은 판잣집 안엔 여자들이 삐걱거리는 의자에 걸터앉아 칼국수를 홀짝대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둘은 구석쪽에 자리 잡았다.


“죽은 년만 억울하지 뭐, 살인자는 이미 아메리카로 날아 버렸을걸, 늘 그랬듯이….”


“언니야, 그래도 우리나라가 있는데 흉악한 살인범을 그냥 두겠어?”


“호호호… 요 계집애야, 넌 신삥이라 잘 모를 거야. 미군 놈이 설령 살인마에, 강도에, 성폭행범이라 하더라도… 한국 경찰과 군인은 절대루 잡을 수가 없어. 소파인지 뭔지 한미동맹 협정을 그렇게 해놨기 땜에 설령 우리나라 대통령이나 장관도 멍하니 닭 쫓던 개처럼 쳐다보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지.”

 

가랑잎보다 못한 양색시 목숨값


“야 이 년들아, 다 처먹었으면 지랄 떨지 말고 어서 가서 엎어져 자든지, 한 놈이라도 잡을 궁리나 해!”


갑자기 백발 할매가 창구로 얼굴을 내밀곤 소리쳤다.
피에로가 헤롱거리며 말했다.


“칼국수에 쐬주도 한 병 줘요.”


“코끝이 발그레한데 또 마셔?”


“오늘 같은 날 한잔 안 하구 뭘 해요, 누님… 우리가 외로운 누님과 망년회를 하려고 이렇게 왔잖아요.”


“난 세월 다 잊었다.”


한마디 던지곤 주방으로 들어갔다.


음식이 나왔을 때는 수다를 떨던 여자들도 슬슬 다 빠져나가 버리고 두 사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청운은 우선 다대기를 떠 넣고 저은 후 두 손으로 그릇을 모아 들곤 칼국수 국물을 후루룩 들이켰다. 겉으론 비록 평범한 싸구려 칼국수처럼 보였지만 그 맛은 그윽했다. 그동안 몇 번 와서 먹었지만 허기뿐만 아니라 속을 은근히 풀어주는 감칠맛은 늘 다름없었다. 육체를 지나 영혼을 울리는 듯한 묘미가 있었다. 면발 위에 김치를 얹어 한입 후루룩 빨아 먹으면 잠시나마 세상의 번민을 잊고 평화를 느낀다는 것이었다.


그래선지 어쩐지 모르지만 혹시 백발 마귀할멈이 국수 속에 어떤 마약을 타지 않았을까 하는 우스갯소리마저 떠돌 정도였다. 백발 할멈은 그냥 빙긋 웃을 뿐이었다.


청운은 투명한 소주를 한 잔 마시고 나서 칼국수 국물을 후루룩 들이켰다. 속이 짜릿해지며 세상만사의 번민이 한 발짝 물러섰다. 설거지를 마친 백발 노파가 쟁반에 과메기와 김 따위를 담아 들고 왔다.


“아이구, 누님… 뭘 이런 것까지… 자, 여기 앉아서 세월을 함께 보냅시다요. 헤헤….”


피에로가 너스레를 떨었다.


“욘석아, 너 먹으라고 가져온 게 아녀. 이미 알딸딸한 꼴이구먼 그려.”


“무대 막간에 공짜로 나오는 술 한두 잔 빨았을 뿐인데 뭘 그래요, 히히….”


“공짜 술 좋아하덜 말어. 그것 땜에 죽는 놈들 많어.”

 

군함도로 끌려간 첫사랑 사내


청운은 술잔을 또 비우곤 과메기를 찢어 고추장에 푹 찍은 후 천천히 씹었다. 숱한 기억들이 부풀어 오르며 뇌리를 괴롭혔다. 악몽 같은 추억… 부모에게 버림받은 배고픈 거지… 지옥의 노예 같았던 선감원 생활… 감언이설로 엄마를 꾀어 꼭두각시로 만든 사이비 종교단체에 잠입했다가 붙잡혔던 일… 북파공작으로 훈련받고 침투되는 과정에서 두 눈으로 직접 본 인간의 잔인함과 참혹한 주검들… 그런 기억들은 마치 머릿속에 든 괴상한 폭발물처럼 언제라도 터져 버릴 듯 위협적으로 사람의 정신을 억압했다.


청운은 젊은 기운에 의지해 짐짓 대범하게 웃곤 했지만, 내심으론 언제 자신도 모른 채 괴물로 변해 자폭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곤 했다. 언론에 보도되진 않았으나, 실제로 북파공작원으로 활동하다가 사회로 퇴출된 사람들 중엔 생활고뿐만 아니라 육신의 고통스런 후유증과 정신적 공황을 견디다 못해 미치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이 많았다고 한다.


‘만일 정신이 착란되면 인간은 누구라도 환청을 듣고 산 사람에게서도 시체 냄새를 맡고 환상을 보며 떨게 될 거야. 그들만의 죄는 아니지. 혹시 신은 알까?’


청운은 빙긋 웃으며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사내 녀석이 너무 촐랑거려도 꼴불견이지만, 얼굴에 수심이 너무 깊어도 별루야. 자, 잔을 들고 송년횐지 망년횐지 한번 건배해 보자구.”


백발 노파가 제안해 셋은 투명한 유리잔을 서로 부딪쳤다. 


“오늘을 위하여 건배!”


피에로가 합죽이 김희갑처럼 웃으며 흥얼거렸다.


“과거를 위해서도 건배….”


백발 노파가 한 마디 보탰다.


“그럼 미래를 위해서도….”


청운도 껴들었다. 세 사람은 잔을 비우고 나서 함께 웃어댔다.


“누님은 어딘지 보살님같아.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님은 아니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


“혹시 어머니나 친할머니 같은 느낌이 들어 그런 게 아닐까?”


청운이 한마디 거들었다.


“글쎄, 뭐… 엄마 얼굴도 모르니까… 세상의 모든 엄마가 어머니로 보이기도 하지. 나비의 엄마, 송아지의 엄마, 사자의 엄마, 병아리 엄마 닭 등… 헤헤, 그래서 우리 누님은 어머니 같은 보살님이란 말이죠 뭐.”


“흥, 하지만… 내겐 애기가 없었어.”


“전엔 아드님과 따님이 있다고 하시더만…?”


“걔들은 내가 거둬 키운 애들인데 커서는 나비나 나방처럼 다 훨훨 날아가 버렸지.”


“오, 그럴 리가… 누님은 젊었을 땐 더 복스럽고 귀엽게 보였을 인상인데, 결혼도 않고 애도 낳지 않았다니… 충격인데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술이나 마셔.”


문 밖의 스산한 바람 소리가 창문을 덜컹덜컹 흔들었다.


“나도 귀엽고 예쁘고 복스런 애를 낳고 싶었지. 하지만 소망일 뿐 그럴 수가 없었단다.”


“왜요?”


백발 노파는 어두워져 가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더니 소주를 또 한잔 마셨다.


“첫사랑이던 고향 오빠가 일본으로 끌려가 버렸기 때문이지. 강제징용이라 카던가. 군함도라는 외딴 바위섬으로 끌려가… 나두 후에 딴 사람한테 들은 얘기지만… 암석을 뚫고 탄광 속으로 수십 길이나 내려가선 석탄 따윌 켜내 왔대. 지옥 같지 않았을까. 바다 밑의 바위굴 속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이 떨려.”


“헤헤, 우리 욕쟁이 누님에게도 순정의 첫사랑이 있었구나. 설마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진 않았겠쥬?”


“욘석이 또 광대 같은 소릴 뇌까리는군.”


그녀는 주먹을 들어 피에로의 이마에 꿀밤 먹이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담배 한 개비를 빼어 물곤 불을 붙였다. 천천히 내뿜는 연기가 그녀의 시름인 양 공기 속에 떠돌았다.


“그분은 일본에서 돌아가셨나요?”


청운이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아녀, 몰라… 그땐 일본 놈들 세상이라 알려주지도 않았어. 그러고 얼마 후엔 나도 끌려 갔으니까.”


“어디로요?”

 

▲ 제2차 세계대전, 차디찬 전장 한가운데 버려진 정민과 아이들.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일본군만 가득한 끔찍한 고통과 아픔의 현장이었다. 사진은 영화 ‘귀향’ 한 장면.    

 

꽃다운 소녀와 화냥년이란 낙인


노파는 담배를 깊이 빨아 한숨과 함께 훅 내쉬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지금도 몰라. 그 바다 밑의 탄광 속에서 죽지 않고 만약 살아 있다면… 음, 내가 끌려간 곳도 역시 일본이었어. 처음엔 일본의 큰 공장에 취직시켜 많은 돈을 벌게 해준다고 속였지. 전국 각지에서 나처럼 끌려온 처녀애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가면서… 난 혹시라도 일본 땅에 닿아 고향 오빠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절망과 희망 속을 헤매고 있었어. 하지만 그 이상스런 열차는 계속 북쪽으로만 달려가더군. 추위에 떨며 황량한 산야를 지나 두만강을 건너 만주 땅에 도착했어. 속은 거였지. 그렇지만 아직 한 가닥 소망은 끝내 놓지 않았어.”


“희망이 없다면 그런 땅에서는 아마 죽고 말겠지요.”


“그런데 마침내 촛불 같은 작은 소망까지도 꺼져 버렸어. 그 촛불이… 소망을 꺾을 수 없는 나머지 내 맘속에 생겨난 환상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결국은… 다 짓밟혀 버리고 말았어.”


“만주 땅에서요?”


“그 당시 만주는 일본군 천지였어. 젊은 사내들을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끌어모아 놓았으니… 가장 강렬한 욕구와 위안이 뭐였겠어, 응?”


“….”


“그래서 우리 조선 처녀애들이 그들의 성 노리개가 되었단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마치 내 여윈 몸 위로 탱크가 지나가는 기분이었지. 고향 오빠가 저 멀리 시퍼런 바다 건너 어느 굴속에서나마 살아 있으리란 작은 희망도 서서히 꺼져 버렸어.”


세찬 밤바람이 허름한 가건물의 함석지붕을 날려 버릴 듯 흔들고 낡은 창문을 덜컹거리게 했다.


“난 내 몸뚱이가 시체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지옥같이 살아갔지. 일본 놈들은 마치 시간(屍姦)을 하는 미치광이 같았어. 히히 웃으며… 시체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놈도 없지 않았지 뭐야.”


“누님, 쐬주 한잔 드시고 얘기하세요.”


“난 강제로 끌려갔고 처녀를 잃었어.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마치 내가 큰 돈이라도 벌러 간 화냥년인 양 얘기하더라구. 하지만 우리들은 친일파와 일본 경찰에 속아 강제로 끌려갔을 뿐야. 돈은 무슨 돈! 겨우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적은 깡보리밥과 다꾸앙을 먹으며 일본군의 성 노리개로 시달렸어. 병이 들어도 치료해 주지 않고 골방에 팽개쳐 두었다가 죽으면 황량한 골짝에 던져 버렸지. 그뿐인 줄 알아? 마루타 부대에 끌려가서 산 채로 생체실험 도구나 되는 경우도 많았대. 그 당시 이광수나 김활란 등 유명한 친일파들이 나서서, 남자들에겐 징용이나 징병을 감언이설로 권유하고… 우리 같은 여자들에겐 정신대에 가입하여 대일본의 황군들을 위해 즐겁게 위안을 해주라고 열띤 강연을 하기도 했어. 아마 니놈들도… 내가, 우리들이,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강제였든 반강제였든 자발적으로 갔든… 우리는 모두 화냥년이란 낙인이 찍히고 말았어. 사람이 아닌 어떤 괴물이랄까?… 세월이 바뀌어 나라를 되찾았는데도 지금은 미군부대 옆에 붙어살며 양색시나 양갈보란 소릴 듣고 있지. 걔들 중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년이 없다곤 할 수 없겠지만… 속내를 알고 보면 대부분 가난에 찌든 나머지 서울로 올라왔다가 속아서 여기까지 흘러든 경우가 많아. 강제로 납치된 애들도 있지만, 대체로 무허가 직업소개소 같은 데 갔다가 떼돈을 벌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속아서 온 것이겠지. 일단 여기 들어오면 나가기가 싶지 않은 게 문제야. 경찰에 신고해도 별 소용이 없어. 오히려 요주의자로 찍히고, 업소에서 고용한 깡패놈들한테 죽도록 얻어맞으니까. 대한민국의 국법은 여기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듯해. 우리나라 대통령마저도 미군에 대해선 큰나라 상전처럼 대하니까 말야. 결국엔 논바닥 속의 미꾸라지나 지렁이마냥 스스로 살아내라는 얘기일 뿐….”

 

북파공작원과 기지촌 양색시


청운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들어 쭉 들이켰다. 그는 생각했다.


‘어딘지 비슷한 데가 있는 것 같군. 북파공작원과 기지촌의 양색시라는 존재들은… 자의인지 타의인지 자의반 타의반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가난이나 굶주림 탓에 상경했다가 사악한 거짓말에 속아서 지옥 속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지. 집에서 쫓겨난 여자애들은 더욱 그렇지 않았을까? 그리고 돈에 현혹되긴 했지만… 나를 포함한 이 쌍놈 쌍년들은 뭔지 몰라도 자기가 나라를 위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거지. 북파공작원들은 물색관에게 속고 양공주들은 직업소개소나 포주협회에 속은 거랄까. 흐흐… 한미친선 관광협회 같은 데서 정기적으로 유명 인사를 초빙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여러분은 최전방에서 총을 들고 나라를 지키는 국군 장병들보다 더 소중한 애국자라고 은근히 추켜세우면서 세뇌시키는 강연을 하고 있으니 우스워. 그래도 그런 말에 슬픈 위안을 받은 사람도 아마 있을 거야. 하지만 결국은 일시적인 환몽이었을 뿐 병마와 죽음이 아직은 젊은 몸뚱이를 차압해 버리면 지옥의 구덩이로 빠져들고 말지. 그러면 국가의 약속도 자신의 의지력도 아무 소용없이 한갓 폐기물이 되고 말아. 그들은 인간 소모품에 불과해. 무엇보다 그들이 더욱 비슷한 건 같은 나라 사람들로부터 괴물 취급에 사갈시된다는 거야. 좀 가련한 인간으로 여겨 줄 만도 하건만 대체 왜 그렇게 괄시를 하는 걸까?’


청운은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는 한편으로 백발 노파의 얘기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해방이 되고 일본군이 물러가자 우리 같은 여자들도 질긴 성노예의 쇠사슬에서 풀려날 줄 알았지. 하지만 현실은 너무 암담할 뿐이었어. 일단 서울까지 겨우 살아서 내려왔지만… 그런 꼴로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가 있나, 돈 한푼이 있나, 무슨 다른 기술이 있나… 결국 다시 시궁창 속으로 기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어. 흐흣, 일본군 위안부가 이번엔 미군 위안부로 변한 셈이지.”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실감이 되지 않는다고나 할까.”


피에로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뭐가, 욘석아?”


“일본 식민지 시대는 호랭이 담배 피던 조선 왕조 무렵의 일이잖아요. 지금 현대는 대한민국 세상인데… 너무 옛날처럼 느껴져서 착각인 듯 혼란스러워요. 어찌 그런 허무맹랑한 일이….”


“욘석아, 그건 네놈이 무식해서 그래. 내가 왜 쓸데없는 거짓말을 하겠냐?”


“그게 아니라….”


“일본과 미국, 일본군과 미군이 뭐 생판 다른 것 같어? 1945년에 해방되자마자 바로 미군이 이 땅에 들어왔어. 너희들에겐 천지 차이로 보일지 몰라도 내겐 그놈이 그놈이야. 외국 병정들에게 시달린 건 비슷하단 얘기지. 사실상 쪽바리가 물러가고 양코배기들이 들어온 건 스물 네댓 해밖에 지나지 않았단 말야.”


“그래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 우리 누님의 인생이 그토록 기구했다니….”


“많은 여자들이 놈들의 폭행으로 인해 죽었고 지금도 죽어 가고 있지. 이렇게 겨우 살아 오긴 했지만, 나도 꿈인지 생시인지 때때로 분간이 잘 안 돼.”


“며칠 전에 살해당한 아가씨는 꽤 착실했다지요?”


“그래, 여기도 자주 왔었는걸. 몸 팔아 번 돈을 알뜰히 모아 고향 부모집에 보내 주곤 했지. 그렇게 착한 애가 왜 그토록 섬뜩하게 죽음을 당해야 하는 걸까?”


셋은 말없이 술잔을 들어 쭉 마셨다.


“직접 거둬 키우셨다는 고아 남매들은…?”


청운이 물었다. 


“뭐, 둥지를 떠나갔으니 재주껏 살고 있겠지.”


백발 노파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어떤 인연으로 자식을 삼으셨어요? 친자식을 버리는 엄마도 있는데….”


“이런 기지촌에서 태어난 애들은 굴뚝새 새끼들과 같은 신세야. 엄마가 살펴주지 않으면 사악한 기생충에게 먹히고 말지. 어린 애들은 병에 걸려 죽기도 하지만, 사람 손에 팔려가 암흑 속으로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기생충의 먹이라고 말하는 거야.”


“그럼 그 애들도요?”


“걔들은 그나마 엄마가 죽을 때까지 보듬고 있었어. 시체가 된 에미의 젖을 빨다가 울다가 하고 있더군. 하나는 백인 새끼고 하는 흑인 새끼였어. 세월이 흘러… 두 놈 중에 하나가 살인범이란 소문이 났었지만 다 미국으로 도망치고 말았지 뭘.”


“참 비극적이군. 만일 셰익스피어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드라마틱한 극본을 썼을지 궁금해.”


피에로가 끼어들었다.


“미친 소리 작작하구 술이나 마셔.”


“누님, 너무 슬퍼 마슈. 내가 더 구구절절 가슴을 울리는 시나리오를 써서 만고에 남을 영화를 만들 테니까.”


“말이사 늘 좋지.”


백발 노파는 주름살을 잔뜩 찡그리며 빙긋 웃었다.


“그런데 누님… 내가 극본을 쓰려 해도, 주인공이 될 누님의 나이가 몇인지 잘 몰사서 캐릭터가 좀 헷갈려.”


“쳇, 무식한 녀석이 영어 나부랭이나 쓰면 좀 유식해질 것 같냐? 에라 이 어릿광대 녀석 같으니라구… 흐흣, 너희들은 날 이상스런 할멈으로 보는 모양인데, 난 사실 평범한 여자일 뿐이란다. 아, 가난한 고향 산천에서나마… 그 오빠도 일본으로 끌려가지 않고 나도 만주로 끌려가지 않고… 고향 땅에서 부부로 만나 오붓이 함께 살 수 있었다면… 그래서 난 항상 열일곱 나이에 멈춰 사는지도 몰라.”


그녀의 충혈된 눈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억누르려 애썼으나 저절로 생겨난 그 눈물을 보며 청운은 소주보다 더 맑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잔을 들어 마셨다. 소주잔에 비친 여인의 모습이 아련해 보였다.


“눈이 여전히 내리는군.”


백발 여인이 말했다. 그녀의 모습은 백발의 겉모습보다 늙어 보이지 않았다. 세파에 찌들어 주름진 얼굴이었지만 문득 그 눈엔 순수한 마음이 반짝 어린 듯도 했다. 멀리서 은은히 종소리가 들려왔다.


“고단했던 하루도, 한 해도 지나고 이미 새해가 시작됐네요.”


“그게 뭐 그리 중요한고, 후훗….”


백발 노파가 중얼거렸다.


좀 더 중요한 점이 없잖아 있었다. 1960년대가 지나고 1970년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청운은 십대의 마지막을 어렵게 지나 이윽고 스무 살이 되었다.


<다음 호에는 ‘리틀 아메리카’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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