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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회의 때 지참한 책 ‘일본회의의 정체’ 지상중계

일본 움직이는 지성인들과 우파조직의 뿌리 그 민낯을 까발린다!

정리/김혜연 기자 l 기사입력 2019-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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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지난 7월22일 오후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열리는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 참석하면서 한 손에는 커피를, 다른 한 손에는 회의자료와 함께 책 한 권을 든 모습이 포착돼 눈길을 끌었다. 조 수석이 지참한 검은 표지의 책 제목은 <일본회의의 정체>(율리시즈)였다. 조 수석이 ‘아베 신조의 군국주의의 꿈 그 중심에 일본회의가 있다’는 부제가 달린 책을 강기정 정무수석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2017년 8월 출간된 이 책은 교도통신 서울특파원을 지낸 저널리스트 아오키 오사무가 아베 정부 이후 역사 왜곡을 근간으로 하는 막말, 부정, 고집, 증오, 선동 등 그 도를 더해가고 있는 일본의 행보를 이해하는 단초로 ‘일본회의’를 겨냥하고 이 단체의 정체를 벗겨 주목을 끌었다. 최근 일본의 경제보복과 관련해 페이스북에 연일 대일 항전 메시지를 던지던 그가 일본을 움직이는 거대한 실체 ‘일본회의’의 전모를 밝힌 책을 들고 나타난 의도는 무엇일까? 일본인의 시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극렬한 시위와 주장에 정부와 지자체가 적극 호응하는 양상은 궁금증을 불러일으켰고, 이러한 호기심은 그동안 일본 언론이 주목하지 않았던 혹은 금기시해온 존재, 일본회의를 주목하게 만들었다. 일본회의는 현재 아베 내각의 각료 19명 중 15명이 속해 있는 조직으로, 일본의 개헌 움직임을 이해하는 출발점인 동시에 우경화의 종착점으로 꼽힌다. 아오키 오사무는 냉정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일본회의의 성립과정과 발자취, 작동방식과 현재까지의 활동 상황을 밀착 취재함으로써 일본을 움직이는 거대한 실체인 일본회의의 전모를 밝혀낸다. 그 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

 


 

조국 민정수석, 일본 움직이는 실체 ‘일본회의’ 전모 공개?
아베 신조 총리 군국주의의 꿈, 그 중심엔 일본회의가 ‘떡~’
일본인도 이해할 수 없는 극렬주장에 정부와 지자체 적극 호응

 

‘도대체 그 근저엔 뭐가 있길래’ 궁금증…금기시 존재 ‘일본회의’
가장 강력한 로비 단체…목표는 국수주의적이고 역사수정주의적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향해 가며 1997년부터 치밀하게 준비

 

일본회의가 열성 다하는 주제는 ‘천황, 황실, 천황제 수호와 숭배’
표면적 ‘얼굴’로 우파계의 유명한 문화인, 경제인, 학자 내세우지만
실제 ‘종교 우파단체’ 가까운 정치집단…천황 중심 국가체제 회귀 욕구

 

▲ 교도통신 서울특파원을 지낸 저널리스트 아오키 오사무가 펴낸 ‘일본회의의 정체’는 아베 정부 이후 역사 왜곡을 근간으로 하는 막말, 부정, 고집, 증오, 선동 등 그 도를 더해가고 있는 일본의 행보를 이해하는 단초로 ‘일본회의’를 겨냥하고 이 단체의 정체를 벗겨 주목을 끌었다.    <뉴시스>   


‘불가역적’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게 만들었던 한일 위안부 협상, 독도 소유권 주장, 그리고 혐한 시위.


언제부턴가 일본과의 갈등 관련 뉴스에는 매번 같은 장면이 반복된다. 역사 왜곡을 근간으로 하는 막말, 부정, 고집, 증오, 선동…. 아베 정부 이후 그 도를 더해가고 있는 일본의 행보는 도대체 그들의 의식세계에 무엇이 버티고 있는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교도통신 서울특파원을 지낸 저널리스트 아오키 오사무가 쓴 <일본회의의 정체>는 그것을 이해하는 단초로 ‘일본회의’를 겨냥한다. 현재 아베 내각의 각료 19명 중 15명이 속해 있는 조직, 일본의 개헌 움직임을 이해하는 출발점인 동시에 우경화의 종착점.


저널리스트 아오키 오사무는 냉정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일본회의의 성립과정과 발자취, 작동방식과 현재까지의 활동상황을 밀착 취재함으로써, 일본을 움직이는 거대한 실체인 일본회의의 전모를 밝혀낸다.

 

▲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지난 7월22일 오후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열리는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 참석하면서 한 손에는 커피를, 다른 한 손에는 회의자료와 함께 책 한 권을 든 모습이 포착돼 눈길을 끌었다.   <뉴시스>    

 

우파인사 총결집한 국민회의


“우파인사가 총결집한 국민회의 ‘일본회의’는 1997년 5월30일, 유력한 우파단체로 알려진 두 조직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와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 통합하면서 새롭게 결성되었다.

 

먼저 전자인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란 단체는 1981년 10월 탄생했는데, 이른바 ‘원호법제화 운동(일본의 공식연호를 기록방법으로 법제화하려는 운동)’ 등을 추진한 단체를 발전시키고 개편한 것이었다.

 

국민회의 운영에 깊이 관여했으며, 과거 자민당을 대표하는 우파로 이름을 날린 전 참의원 무라카미 마사쿠니(노동성 장관.,자민당 참의원 회장 등을 역임)를 방문하여 이 단체의 경위에 관해 물었다. 그는 지난날을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었다.”


아오키 오사무는 선배 저널리스트인 우오즈미 아키라가 쓴 무라카미와의 대담집 <증언 무라카미 마사쿠니: 나. 국가에 배신당하더라도>의 내용에 따라 그의 증언을 이렇게 소개했다.


‘천황 재위 50년(1975년)의 봉축행사, 그리고 그 뒤 이어진 원호 법제화 운동이 성공하자(원호법 제정은 1979년) 애써 결집한 조직을 해산시키는 게 안타깝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새로운 주제를 추진하는 국민회의를 결성하게 되었고, 재계와 정계, 학계, 종교계 등의 대표가 중심이 되어 약 800명 정도가 모여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를 결성한 것입니다.’


국민회의 발족 당시 의장에는 외교관으로 유엔 대사 등을 지낸 가세 도시 카즈가 뽑혔고, 우파논객으로 유명한 작곡가 마유즈미 도시로가 운영위원장 자격으로 단체 전체를 관리하는 모양새였다. 사무 쪽을 총괄하는 사무총장은 메이지 신궁의 부대표인 소에지마 히로유키가 맡았다.

 

얼마 후 마유즈미 도시로가 의장직을 이어받으면서 단체는 한때 일본 우파운동의 중추로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대표적인 활동 중 하나가 고등학교 일본사 교과서인 <신편 일본사>를 편찬한 일일 것이다. 교과서 편찬작업은 1986년 국민회의가 주도했는데, 복고조의 역사관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국민회의 활동에 임원 둥의 자격으로 참여한 이들을 열거하면. 여러 인물을 만날 수 있다.


우노 세이치(도쿄 대학 명예교수), 시미즈 이쿠타로 (가쿠슈인 대학 교수), 고보리 게이치로(도쿄 대학 명예교수), 에토 준(평론가, 도쿄 공대 교수), 고야마 겐이치(가쿠슈인 대학 교수), 무라마쓰 다케시(쓰쿠바 대학 명예교수), 가세 히데아키(외교평론가), 무라오 지로(역사학자), 세지마 류조(이토추 상사 회장 등 역임), 이부카 마사루(소니 명예회장), 이시이 고이치로(브리지스톤 사이클 상담역), 쓰카모토 고이치(와코루 창업자), 다케미 다로(일본의사회 회장), 오다무라 시로(전 행정관리 사무관, 다쿠쇼쿠 대학 총장). 나카가와 야스히로(쓰쿠바 대학 명예교수), 모모치 아키라(일본대학 교수), 오하라 야스오(고쿠가쿠인 대학 교수) 등.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일본의 신구 우파인사들이 총망라된 면면이다. 국민회의는 말 그대로 학계, 재계, 종교계, 정계의 우파란 우파는 모두 결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조직이다.

 

▲ 일본회의가 전개하는 다양한 복고정책, 그에 대한 지지의 호소는 아베 정권을 자극하고 아베의 정치 목표를 지지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    

 

우파계 종교단체 결집


또한 ‘일본을 지키는 모임’은 국민회의에 앞서 1974년, 주로 우파계 종교단체가 중심이 되어 결성했는데 이른바 종교 우파조직이라 할 수 있다. 전 자민당 참의원인 무라카미 마사쿠니는 이 단체에서도 ‘국사 대책국장’으로 참여하여 단체의 설립 경위를 잘 알았다고 한다.


무라카미의 말에 따르면, 이 단체를 결성한 발단은 임제종 승려인 아사히나 소겐이었던 듯하다. 가마쿠라 엔카구지의 주지를 맡기도 했던 아사히나는 정치인 오자키 유키오와 기독교 사회운동가인 가가와 도요히코 등과 함께 세계연방운동(세계를 하나의 연방국가로 건설하려는 운동)을 펼친 경력도 있다.


다음은 무라카미의 증언이다.


“이사히나 씨는 본래 평화운동에 열심이었습니다만, 어느 날 이세 신궁을 참배한 후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메이지 신궁의 다테 다쓰미 신관 과 도미오카하치만 궁의 도미오카 모리히코 신관, 그리고 다니구치 마사하부 선생님 같은 분들에게 ‘일본을 지키는 모임’을 결성하자고 호소했습니다.

 

그 모임이 커지면서 각 종교단체 지도자나 사상가, 문화인이 가세했고 결국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 결성된 것입니다.”


우파계 종교단체를 축으로 결성된 ‘일본을 지키는 모임’은 사무국을 도쿄 시부야구의 메이지 신궁 회관에 두고, 사무총장에는 ‘국민회의’와 마찬가지로 메이지 신궁의 신관이던 소에지마 히로유키가 취임했다.

 

소에지마가 1989년에 남긴 저서 <내가 걸어온 쇼와사>에 따르면, 모임의 대표위원 등 여러 임원에는 아사히나 소겐(임제종 엔카쿠지, 다테 다쓰미예이지 신궁), 도미오카 모리히코(도미오카하치만 궁), 이와모토 가쓰토시(조동종 소지지), 가네코 니치(일련종 흔몬지) 같은 인물들이 임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국민회의와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 통합하여 1997년에 새롭게 탄생한 조직이 일본회의였다. 즉, 전후 일본의 우파계 정치가, 학자, 문화인, 경제인, 그리고 신자와 자금이 풍부한 종교단체가 대동단결하는 형태로 발족한 것이 일본회의다.


무라카미 마사쿠니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을 지키는 모임은 종교인과 문화인의 모임이었고, 국민회의는 정계·재계·학계 등 각계 대표자 모임이었다고 한다. 양쪽 모두 사무국은 도야마 가쓰시나 가바시마 유조가 담당했다. 조직은 각각 별개였지만, 사무국은 한 곳이었다는 말이다.


이후 두 조직의 임원회에 제의하여 탄생한 것이 일본회의였다. 여기에 등장하는 도야마 가쓰시는 메이지 신궁의 신관 출신이고, 가바시마 유조는 섕장의 집 학생조직의 활동가 출신인데, 가바시마 유조는 현재 일본회의 사무총장으로 단체의 실무를 담당하는 핵심인물이다.

 

▲ 일본회의의 정체는 전후 일본 민주주의 체제를 사멸의 길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악성 바이러스와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질주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뉴시스>

 

최대의 적 상실과 원점회귀


1997년 5월30일, 일본회의의 설립대회가 도쿄 기오이초에 있는 호텔 뉴오타니에서 열렸다.

 

일본회의 측 기록에 따르면, 설립대회에는 약 1000여 명의 정계, 재계, 학계, 종교단체 대표자 등이 참가했고, 초대회장에는 와코루 회장인 쓰카모토 고이치, 부회장에는 성악가인 안자이 아이코, 브리지스톤 사이클 전 사장 이시이 고이치로, 신사본청 총장 오카모토 겐지, 다루쇼쿠 대학 총장 오다무라 시로, 메이지 대학 교수 고보리 게이치로, 이 밖에 이사장에는 메이지 신궁 신관인 다나카 야스히로가 각각 취임했다.


이 중 다나카 야스히로가 발표한 ‘설립선언’ 일부를 축약하여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자연과 공생하면서 전통을 존중하고, 해외 문명을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승화하면서 국가건설에 최선을 다해 힘써왔다. 메이지 유신으로 시작된 최초의 근대국가 건설은 이러한 국풍의 눈부신 정수였다.

 

또한 유사 이래 전대미문의 패전을 경험하면서도 천황을 국민통치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국가의 특색은 전혀 변함없이 이어져 왔으며 황폐해진 국토와 정신적인 허탈감 속에서도 국민의 충실한 노력을 토대로 나라를 경제대국으로까지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런 놀랄 만한 경제적 번영의 그늘에서 일찍이 우리 선조가 키우고 계승한 전통문화는 경시되었고, 빛나는 역사는 잊히고 오욕되었으며 국가를 지키고 사회공공에 힘쓰던 기개는 사라졌다.

 

그 결과 오직 개인의 보신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풍조가 사회 곳곳에 만연하여 바야흐로 국가를 무너뜨리고 있다.

 

아울러 냉전구조가 붕괴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오류는 철저히 폭로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세계는 각국이 노골적으로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새로운 혼돈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일본에는 이 격동의 국제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확고한 이념과 국가목표가 없다. 이대로 무위도식한다면 망국의 위기가 소리 없이 닥쳐오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일본인으로서의 혹독한 자각에 근거하여, 국가발전과 세계공영에 공헌할 수 있는 활기찬 국가건설과 인재 육성을 추진하고자 본회를 설립한다.”


저널리스트 아오키 오사무는 “이 설립선언에서는 다양한 의도를 읽어낼 수가 있다”면서 무엇보다 국가의 전통을 중시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들은 주로 메이지 유신 이후에 만들어진 전통으로 이를 눈부신 정수라고까지 칭찬하고 있다. 또 전후 일본 역사에 대해서는 경제발전을 자의적으로 찬양하면서 전통문화와 빛나는 역사, 그리고 국가를 지키는 기개가 사라지고 있다고 개탄한다. 이는 전형적이면서 지극히 진부한 전후 우파의 논리다.”

 

일본은 왜 타협할 수 없는가


몇 해 전부터 일본에서 ‘일본회의’ 관련 서적들이 출간되기 시작한 것은 아베 정부의 헌법 개정 움직임과 맞물려 극우세력의 활동이 부쩍 활발해지면서부터다.

 

일본인의 시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극렬한 시위와 주장에 정부와 지자체가 적극 호응하는 양상은 ‘도대체 그 근저에는 무엇이 있길래’라는 궁금증을 불러일으켰고, 이러한 호기심은 그동안 일본 언론이 주목하지 않았던, 혹은 금기시해온 존재 ‘일본회의’를 주목하게 만들었다.


일본회의를 정의하는 방식은 저자들마다 다양하다. 워낙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 있던 집단인 만큼 그 허와 실에 대해서는 저마다 의견이 분분하며 사실관계 다툼에 따라 소송과 판매금지 등의 여파도 뒤따르는 실정이다.

 

그중에서도 철저한 자료조사와 관련 인물 취재를 통해 가장 객관적이고 공정한 입장을 견지했다는 평을 받는 아오키 오사무의 책은 ‘반골 저널리스트’라 불리며 그간 국가권력, 공안경찰, 위안부 등 불편한 진실을 정면으로 취재해온 저자의 결기와 오기를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그는 일본회의를 취재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발밑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도 미디어가 전달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지할 수 없다.

 

사건이 경악할 만하거나 매우 비정상적이거나 시급한 대책이 필요할 만큼 심각한데도 미디어가 정확히 전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판단과 대책의 전 단계가 되는, 사건 자체의 발생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어영부영 시간이 해결해주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다.

 

설령 미디어가 전달했다 하더라도 전체 상황을 정확하고 올바르게 전하지 못하면, 역시 같은 함정에 빠질 위험성이 높다.

 

다시 말해 사회의 거울이어야 할 미디어가 얼룩졌거나 비틀렸다면 우리는 제 얼굴도 정확히 못 보게 되어 적절한 대책과 냉정한 사고를 위한 첫 번째 소재조차 손에 넣지 못한다.”

 

그렇다면 왜 대상이 ‘일본회의’여야 했는가? 


제2차 아베 정권 탄생 후 침묵하고 있는 일본 언론과는 달리, 외국 언론은 일본회의를 ‘극단적인 우파’, ‘반동적 그룹’(미국 CNN), ‘극우 로비 단체’(오스트레일리아 ABC TV), ‘강력한 초국가주의 단체’(프랑스 르몽드) 등으로 평가했고, 아베 정권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본회의가 국책을 장악하고 있다’(오스트레일리아 ABC)거나 ‘아베 내각을 좌지우지하며 역사관을 공유한다’(미국 CNN)고 분석해 타전했다.

 

저자는 이들의 주장이 과연 사실인지, 철저한 검증을 통해 일본회의라는 우파조직의 정체를 알리는 동시에 현재 일본의 정치와 사회에서 감지되는 문제점을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일본회의는 1997년 5월 30일, 대표적인 우파단체인 ‘일본을 지키는 모임’과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통합하면서 결성된 조직이다. ‘일본을 지키는 모임’은 1974년 우파계 종교단체가 중심이 돼 결성됐고,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는 1981년 정계·재계, 학계, 종교계 우파가 총결집해 만들었다.


그 이름조차 평이한 ‘일본회의’는 현재 가장 강력한 로비 단체로, 그들의 목표를 정의하자면 국수주의적이고 역사수정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가장 중시하여 열성을 다해온 주제는 △천황, 황실, 천황제의 수호와 그 숭배 △현행 헌법과 그로 상징되는 전후체제의 타파 △애국적인 교육의 추진 △전통적인 가족관의 고집 △자학적인 역사관의 부정 등 5가지다.

 

이 주제는 일본회의 인사들에게 너무도 중요한 것이어서, 이를 침해하거나 경시하는 정책과 언동은 때때로 과민할 정도의 반응을 일으킨다. 이들의 뿌리에서 저자가 주목한 것은 ‘종교심’이다.


“일반인의 감각으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지만, 어린 시절부터 심어진 ‘종교심’은 쉽게 흔들리지 않고 쉽게 바뀌지 않고 바꿀 수조차 없다.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건 신경 쓰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믿는 바를 향해 오직 직진할 뿐이다. 그래서 강하다. 그래서 굽히지 않는다. 그래서 끈질기다. 그것은 확실히 끈기 있고 인내심 강한 활동의 근원이 되었고, 일본회의와 같은 조직을 육성하는 데 위력을 발휘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동시에 그 운동의 저변에는 뿌리 뽑기 어려운 컬트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들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영어권에서 현대 천황제 연구의 일인자로 알려진 케네스 루오프의 분석에 따르면, 이들의 목표는 ‘메이지의 정치제제와 이념의 부활’로 귀결된다. 즉 전쟁 전 체제로의 회귀가 핵심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회의의 원류라 할 신흥종교단체 ‘생장의 집’을 주목해야 한다. 저널리스트 아오키 오사무는 “무라카미가 말하는 다니구치 마사하루는 신흥 종교단체인 ‘생장(生長)의 집’의 교조”라고 설명한다.


다니구치 마사하루는 1893년 효고 현에서 태어났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930년에 생장의 집을 창설한 괴인물이라고. 전쟁 때는 ‘일본 정신의 현현(顯現)’을 호소하며 군부의 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급속히 신자를 늘려나갔다.

 

전후에는 한때 신자 수가 300만 명을 웃돌 정도로 교세를 자랑했고, 1964년에는 정치조직으로서 ‘생장의 집 정치연합(약칭 생정련)’을 조직하여 정계 진출을 도모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생장의 집은 우파 경향이 매우 강한 거대한 신흥종교 단체로, 한때는 현실 정계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사실 무라카미 마사쿠니 자신도 과거 ‘생장의 집’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자민당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한 ‘생장의 집’ 계열 정치가였다고 한다.

 

저널리스트 아오키 오사무는 “생장의 집 교조인 다니구치 마사하루가 ‘일본을 지키는 모임’의 결성에 크게 공헌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본을 지키는 모임’의 설립에 크게 이바지한 도미오카 모리히코의 뒤를 이어 도미오카하치만 궁의 신관이 된 사와타리 모리후사가 1985년, <조국과 청년> 1985년 8월호에 게재한 글도 인용한다.


조국과 청년은 생장의 집 출신자들로 이루어진 우파단체 ‘일본청년협의회’가 발행한 기관지다.

 

내용이 조금 길지만, 생장의 집이 신흥종교와 신도(일본 고유의 민족종교 민간신앙에 외래종교인 유교·불교의 영향을 받아 성립했으며, 신사와 왕실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 계열 종교단체가 전쟁 후 일본 우파 운동의 원류로서 어떻게 자리 잡아가는지 그 과정을 엿볼 수 있으므로 자세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73년경의 일이었다. 도미오카하치만 궁의 선대 도미오카 모리히코 신관이 신도 이세의 숙소에서 가마쿠라 엔카쿠지의 아사히나 소겐 관장과 함께 묵을 때였다.

 

그들은 일본의 현재를 걱정하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이 앞으로 행동을 일으키려 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무엇보다 메이지 신궁 신사의 경내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다테 다쓰미 신관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다테 신관은 도미오카 신관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유식자 여러 사람을 찾아뵙기 시작했는데, 가장 먼저 한 이가 바로 생장의 집 다니구치 마사하루 총재였다.


당시 나는 도미오카 신관을 따라 다니는 일이 많았는데 어느 날, 아사히나와 도미오카 두 신관이 하라주쿠 본부로 다니구치 총재를 방문했을 때 나도 함께했다.

 

두 신관께서는 다니구치 총재에게 방문목적을 교대로 이야기하면서 세상을 걱정하고 종교심의 환기를 논했다. 정신운동의 필요성에 관해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졌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때 다니구치 총재 입에서 강력한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생장의 집이 두세 개쯤 사라지더라도 조국 일본이 본래 모습을 되찾기만 한다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 우리는 그런 각오와 굳은 결의로 생장의 집을 거점으로 종교활동에 정진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협력해야 할 일일 뿐 아니라 생장의 집 활동 자체가 목표하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실로 애국자의 잠언이었다. 이에 힘을 얻은 두 신관은 이후 각자 여러 유식자를 방문하여 설득한 결과, 1974년 4월2일 메이지 기념관에서 ‘일본을 지키는 모임’을 발족하게 되었다.”


신도 종교의 중심적 존재라 할 수 있는 메이지 신궁. 그리고 전후 일본 우파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다니구치 마사하루가 이끄는 거대 신흥종교 ‘생장의 집’ 양대 진영의 지도자들에게 우파계 종교인이 호소함으로써 두 진영의 두터운 지원을 받으며 발족한 ‘일본을 지키는 모임’. 이 구도는 지금도 여전히 명맥을 잇고 있다고 한다.


즉, 일본회의라는 존재의 배후에는 신사본청을 축으로 하는 신 도 종교단체와 생장의 집의 그림자가 조직과 인맥에 드리웠고, 어쩌면 자금에도 짙게 드리워져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일본회의라는 거대한 우파단체를 만들어 키워온 이들의 핵심과 주변에는 전공투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우파학생운동을 조직한 생장의 집 신자들이 있다. 이들은 창건자 다니구치 마사하루가 주창한 국민주권의 철폐와 천황주권 수호, 현행 헌법의 파기와 메이지헌법 체제로의 회귀를 열렬히 신봉하면서 정치운동과 조직구축에 전력을 다해왔다.

 

섬뜩할 정도로 복고적인 이러한 사상과 가르침은 전후 일본 우파에 면면히 계승되었고 우파계 문화인뿐만 아니라 정계 주류의 여당 간부, 재계 인사들도 폭넓게 신봉해왔다.

 

여기에 신사 본청과 메이지 신궁, 야스쿠니 같은 신사 외에도 신도계와 불교계 등 다수의 신흥종교단체 역시 중요한 또 다른 축인데, 이들은 특히 자금 동원과 지원 부분에서 막강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종교 우파단체 가까운 정치집단


“일본회의는 표면적인 ‘얼굴’로 우파계의 유명한 문화인, 경제인, 학자를 내세우지만, 실제 모습은 ‘종교 우파단체’에 가까운 정치집단이라 할 것이다.

 

거기에 배경음악처럼 깔린 것이 바로 전쟁 전 체제, 즉 천황 중심 국가체제로의 회귀 욕구다.

 

그렇다면 일본회의의 활동은 과거 이 나라를 파멸로 이끈 복고체제와 같은 것을 다시금 초래할 위험성이 있는 동시에 ‘정교분리’라는 근대민주주의의 대원칙을 근본에서부터 흔들 위험성까지 내포한 정치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종교 우파집단’이 선도하는 정치활동이 지금 확실하게 기세를 떨치며 현실정치에 영향력을 높이고 있다.”


학생운동을 통해 조직의 확대, 유지, 충실에 필요한 실무적 노하우를 갖추게 된 이들은 ‘지방에서 도시로’라는 마오쩌둥의 전략을 활용해 광범위한 ‘풀뿌리 운동’을 전개한다.

 

2016년 1월 기준, 일본회의는 전국에 243개의 지부를 갖췄고 앞으로 300지부 설치를 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중앙정계에는 이들의 이념과 정책에 호응하는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일본회의 국회의원간담회’를, 지방의회에는 전국 도도부현·시구읍면의회 의원으로 구성된 ‘일본회의 지방의원연맹’이 존재한다.

 

이들이 전개하는 다양한 복고정책, 그에 대한 지지의 호소는 아베 정권을 자극하고 아베의 정치 목표를 지지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


대규모 운동의 경우에는 신사본청이나 신사계, 신흥종교단체와 같은 동원력, 자금력을 보유한 조직의 후원을 받으면서 전국 각지에 ‘캐러밴대’라는 명칭의 회원부대를 파견하여 ‘풀뿌리 운동’으로 대량의 서명 모집과 지방조직 구축, 또는 지방의회에서의 결의와 의견서 채택을 추진함으로써 ‘여론’을 형성한다.

 

그와 동시에 중앙에서도 일본회의와 그 관련 단체, 종교단체 등이 연계하여 ‘국민회의’라는 명칭의 조직을 설립하고, 대규모 집회 등을 파상적으로 개최하여 시선을 끌면서 전국에서 모은 서명과 지방의회의 결의, 의견서를 갖고 중앙정계를 압박한다.


“한편, 뜻을 같이하는 국회의원들도 이에 호응하여 의원연맹이나 의원 모임을 결성하고, 여당과 정책결정자를 움직여 운동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위한 토대로 일본회의는 지금까지 국회의원 간담회나 지방의원연맹의 내실을 다지면서 가맹의원 수를 착실히 늘려왔다.”


이러한 전방위적 조직을 활용한 압박으로 이들이 지향하는 국가·사회상을 실현하기 위한 집요한 노력은 실제로도 상당한 성과를 이끌어냈는데, 원호법제화 운동이나 건국기념일의 공휴일 지정, 애국적인 역사교과서 편찬, 국기국가법의 제정, 황실숭배 의식의 함양, 헌법 개정의 전초전으로서의 교육기본법 개정 등이 그 사례들이다.


현재 일본의 상황은 ‘아래로부터’의 운동과 ‘위로부터’의 정치력이 훌륭하게 연계된, 우파가 염원하는 정책 실현 환경이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아베 정권의 탄생으로 주어진 천재일우의 기회를 어떻게 해서든 붙잡아 오랜 비원인 개헌 실현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염원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들이 국가를 사랑하는 방식


일본회의가 어떻게 탄생했고, 그들이 무슨 생각으로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앞으로의 일본의 행방을 가늠하는 중요한 키워드일 것이다.

 

이들의 활동 면면을 보면 역사적 증거를 들이밀어도 꿈쩍 않는 뻔뻔함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앞으로 이들을 설득해 우리가 원하는 사과와 보상을 받아낼 수 있을지, 요원하게 느껴진다.


이들이 최초의 성공을 맛본 것은 ‘원호 법제화’ 운동이 그 시작이다. 패전 후 천황제의 상징인 원호제를 잊어가던 일본에, 운동 제창 2년 만에 원호법 입법이라는 쾌거를 거둔 사건이다.

 

다음은 그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회의가 주도해 진행한 운동 중 중요한 몇 가지들이다.


-고등학교용 일본사 교과서 <신편 일본사> 편찬 운동(1985∼1986): 중국, 한국 등의 거센 반발을 부른 문제의 역사교과서 개정 작업의 시작


-신헌법연구소 조직(1991∼): 현행 헌법의 국민주권을 부정하고 천황제를 지지하는 헌법관의 본격 등장


-전후 50년 국회결의 반대(1994∼1995): 주변국에 대한 과거 침략 전쟁의 인정과 사과, 절대 반대


-선택적 부부별성제도 반대(1996∼): 희망에 따라 결혼 전의 성을 쓰도록 인정하는 제도는 전통적인 가족관을 파괴할 수 있다며 격렬 반대


-국기국가법 제정 운동(1999): 일장기·기미가요에 대한 경애 정신을 키우기 위해 법제화가 필요하다는 주장


-외국인의 지방참정권 반대 운동(1999∼): 주로 재일한국인에 대한 논의. ‘국가쇠퇴의 징조’라며 반발


-야스쿠니 신사 20만 참배 운동(2005): 종전 60주년 기념, 8월 15일 총리의 참배 요구 운동과 함께 시행


-교육기본법 개정 운동(2000∼2006): 교육개혁국민회의 발족, 교육기본법 개정을 요구하는 중앙국민대회 개최. ‘애국심을 고취하고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일깨우자’는 운동. 헌법 개정의 전초전격


-제1차 아베 정권의 탄생(2006∼): ‘아름다운 국가 건설-전후체제로부터의 탈각’을 슬로건으로 내각 발족. 이로써 전후 우파에게 가장 이상적인 정권이 탄생한다.


그리고 현재 일본의회가 40년 넘게 공들여온 개헌 운동, 더 정확히는 일본의 군대 보유를 금지하는 헌법 9조(평화헌법)를 무력화하자는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일본회의의 정체는 전후 일본 민주주의 체제를 사멸의 길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악성 바이러스와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질주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정리/김혜연 기자의 다른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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