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는 길에 보니 가로수 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다. 늦가을이 더욱 깊어지니 추락의 계절이 아닌 조락(凋落)의 계절이다. 여름내 푸르렀던 은행잎들이 노랗게 채색되고 낙엽이 돼 바람이 불때마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을 보면서 ‘자연도 이젠 이별 연습을 하는구나’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이별 연습이라고 하니 묘한 기분이 든다. 생명체의 모든 것들은 쇠락에 따른 이별이 필연이지만 필자는 이별에 서투른 편이다. 개인사지만 유복자라 생부의 얼굴을 못 보았고, 초등학교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혈연이나 깊이 알고 지내는 분들과의 영원한 이별을 체험하지 못했으니 가슴을 치도록 까지 느껴지는 애통함은 맛보지 못했다.
나이가 들어 육십이 지나고 보니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가까운 분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가고 있으니 이제는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인연의 소중함과 추모의 정이 한꺼번에 닥치고 있다. 생사이별은 자연이치이니 모질게 마음먹자고 다짐해도 쉽게 되지 않는다.
정말 혈육만큼이나 친하게 지냈던 고향 선배님이 영면하신지 한달이 채 안 되다 보니 저렇게 거리에서 나뭇잎 떨어지는 장면만 봐도 가슴 한 구석이 저미어온다. 고인 살아생전에 그분을 직접 대면하지 못했던 국민들이 그 분을 두고 ‘국민배우, 큰 별이 지다’라고 애도했으니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형님 동생’하며 지냈던 분이라 실감이 나지 않고 두고두고 애석함이다.
본명인 강신영이나 개명한 ‘강신성일’ 이름보다는 ‘국민배우 신성일’로 더 알려진 형님은 영면하신지 오늘로서 꼭 26일째 맞았다. 그 동안 상심한 채로 애도하고 했지만 가슴 저리고 아픈 마음은 이루말할 수다 없었다. 가뜩이나 최근 몇 년 사이에 이생에서 필자가 가장 믿고 따르며 정을 나눴던 다섯 분이 고인이 됐으니 이별이 서툰 나에게는 두고두고 아픔으로 남는다.
평소에 가까이 지내며 예술인으로 존경했던 이필동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초대 위원장을 지난 2008년 7월 황망히 떠나보냈다. 영화감독을 지낸바 있는 이창동 문화관공부장관의 친형이기도 한 이필동 형님은 1966년 연극의 불모지 대구에 내려와 온 정열을 불사르며 대구가 세계적인 뮤지컬 도시로 만드는 게 꿈이었으니,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아 지금 한국의 뮤지컬 도시로 자리잡은 건 이필동 형님의 노력 덕분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지금도 그를 못 잊고 있다.
또 한분, 삼성가의 장남이신 고 이맹희(전 제일비료 회장) 어르신은 필자가 1981년부터 1990년까지 10년을 직접 모셨고 그 이후 타계하실 때까지 내게는 정신적 지주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인생 공부를 시켜주신 분이 2015년 8월에 돌아가셨을 때 정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아픔을 겪었으니 그때부터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영원한 이별이 어떤 것인지 실감했다.
이별의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소중한 아우를 가슴에 묻어야 했다. ‘국민소리꾼’으로 이름난 장사익 선생의 친동생인 장두익이다. 형제애가 남달랐던 장사익 형님을 지켜보는 필자의마음은 애잔했으니 선생과 춤꾼 하용부와 필자는 밤을 세워 애통하고 또 애통했던 것이다. 그런데 또 한분, ‘한국패션계의 레전드’ 이재연 회장님이 고인됐다는 소식은 청천벽력이었다.
작년 여름에 이 회장님이 영면했다는 부음을 받았을 때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생시인지 꿈인지조차 아리송해한 것은 너무나 좋은 분과의 이생에서의 이별이 너무나 빨리 다가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모델 1호’였던 고인을 알고 지낸지 30년이 훨씬 넘는 세월동안 우리사이에는 허물이 없었다.
그 좋은 분들이 이생을 떠나가서 아쉬움을 가슴에 품고 살았는데 또 다시 하늘 무너지는 소리, 강신성일(이하 ‘신성일’로 호칭) 형님의 부고를 접했으니 나의 마음이 어떠했으랴. 최근까지 영화산업의 진흥과 대구뮤지컬 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그 분은 서울에서 영천으로 내려와 사시는 동안 지역 문화예술을 위해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잘 알다시피 신성일의 고향은 경북 영덕이다. 필자의 고향도 그곳이어서 우리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터에 함께 동고동락한 세월이 길다보니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면서 정을 돈독히 했다. 특히 신성일이 강신성일란 이름으로 대구 동구에서 국회의원 시절에 필자도 경상북도의회 의원으로 재직하던 때였으니 정치 동지로서도 우리는 많은 것을 논의하며 뜻을 함께 했던 것이다.
![]() ▲ 고인의 국회의원 시절, 2002년 신한국당 대선후보 선출 경선장에서(좌측이 경북도의원 시절의 필자). |
그가 국민배우로 칭송됨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고 증명이 된다. 신성일은 1957년 신상옥 감독이 운영하던 신필름을 통해 배우로 발탁됐는데, 신 감독이 신인을 보고 ‘뉴스타 넘버원’이란 뜻으로 ‘신성일’이란 예명을 지어줬고, 이름을 한자로 풀이해 신성일(申星一)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영화계에 데뷔했고, 그 후 60∼70년대 최고 톱스타 자리에 오르면서 한국영화계를 주름잡았다.
![]() ▲신성일 주연, ‘맨발의 청춘’ 영화 포스터(1964). |
영화계에 혜성같이 나타나 국민배우로 자리매김한 신성일은 데뷔 후 506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신기록을 세웠고, ‘맨발의 청춘’(1964), ‘별들의 고향’(1974) 등 영화사에 길이 남을 숱한 명작들을 남겼다.
영화계 발전을 정진하면서도 대구 동구에서 16대 국회의원(2000~2004)을 지냈으며, 최근까지 경북 영천시 괴연동 채악산 자락 아래 한옥주택에 머무르면서 한국영화 발전과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이사장과 명예조직위원장을 맡아 열성적으로 일해 오셨다.
신성일은 영화배우로 한 세상을 풍미했지만 자신은 영화배우보다 영화인으로 사는 걸 더 좋아하고 그렇게 알려지기를 원했다.
2009년 어느 봄날에 그의 자택인 영천시 한옥주택에서 자신의 영화인생 40여년을 회고한 인터뷰집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 출판기념회가 열렸을 때 고인이 한 말이 있다.
“죽을 때까지 영화인입니다. 나는 영화배우보다 영화인으로 존재하고 싶어요. 올바른 한국 영화 정신을 지닌 영화인으로 존재하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듣고는 평상시에 나타난 그 열정을 알 수 있었고 나는 그런 형님을 좋아했다.
자신은 은퇴가 없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영화인으로서 한국영화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더 기여하겠다는 것이며, 자신이 정치인 생활을 했던 대구가 뮤지컬의 도시로 우뚝 솟기 위해 서울로, 부산으로, 밀양으로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 ▲ 신성일과 필자(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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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성일 엄앵란 부부 결혼 47주년(2012.11.14) 기념식수(좌로부터 필자, 고인과 딸). |
그와 같이 신성일이 한국영화계 최고의 영화배우였고, 평생 영화인으로 살아오면서 인간적인 정은 늘 유지했다. 몇 년 전 겨울에 문화예술과 관련된 일로 서울에 동행해 갔을 때 일이다. 일을 마치고 되돌아오는 서울역 앞 좌판에서 함께 가죽지갑을 샀는데 서로 자신의 지갑이 더 좋다며 자랑하고 있으니 신성일을 아는 시민들이 몰려와 구경했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서민적인 모습이 좋다고 말했던바 지방에서 소탈한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영화진흥과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관련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영천의 자택 성일가(星一家)에서 한옥주택을 가꾸거나, 영천시내에 나가 포장마차 음식을 즐겨 들면서 시민들과 담소하는 등 중소도시의 평범한 시민생활을 즐겨했으니 자연에서 얻은 여유로움이었으리라.
![]() ▲ 신성일 엄앵란 부부 결혼 47주년(201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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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신성일이 영천에 채약산 자락 밑에 터를 잡고 생활했던 초기에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성일가를 들락날락하면서 고향인 영덕에서 가져온 대게, 오징어, 건어물 등을 드렸는데, 그는 동해안이 고향이라서 그런지 바다냄새 질펀한 해산물들을 좋아했다. 고향바다에서 난 싱싱한 회나 영덕대개가 그렇게 맛있다는 그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추억서린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신성일을 추모할 뿐이지, 현실에서는 국민배우이자 영원한 영화인 신성일 형님을 뵐 수가 없다. 살아생전에 동향인으로서 또 예술활동에서 죽이 잘 맞은 형을 위해 할 일이 있다. 우리 문화예술인들이 힘을 합해 신성일이 이루려고 했던 무언의 약속을 잘 지키는 일이다.
영화 예명 그대로 빛나는 별 하나, 신성일이 평생에 하고자 했던, 그러나 이루지 못한 소원인 영화박물관을 영천 성일가 자택 부근에 지어 영화의 메카로 만드는 일과 그가 고등학교를 다녔고 정치적 고향이 된 대구 동구지역에서 영화관련 자원을 이용한 ‘신성일 기념공원’이라도 만들어 그가 보인 열정의 영화인생을 더욱 빛내게 하는 일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필자와 오랫동안 소중한 연을 맺어왔던 거성의 망자를 위해 기도해본다. 인생무상이 아닌 이생에서 해야 나의 할 일이 더 하나 늘었음에 무거운 책임을 느끼면서 곁에 있는 듯 그 분을 풋풋한 인상을 떠올려 본다. 웃음이 싱그러웠고 음미로웠던 내가 존경했던 고향선배님, 신성일 형을 다시금 생각하면서 고인의 명복을 빌어본다.
한국영화계의 대부, 신성일은 떠나고 없지만 그가 남긴 한국영화 발전을 위한 훌륭한 족적들은 맘을 것이며, 두고두고 영화 역사와 함께 후세에서도 영원하리라.
*필자/손경찬. 칼럼니스트, 시인. 수필가. 대구예총 정책기획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