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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이야기 품은 고택으로 떠나는 여행

함양 일두고택 거닐며 ‘탁한 마음’ 깨끗이 씻어보라!

정리/김수정 기자 l 기사입력 2023-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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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춰버린 듯 숱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고택(古宅). 마당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조차 사연이 스며 있을 듯하다. 오랜 세월 빗장을 걸어놓았던 고택이 푸근한 집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최근 들어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고택을 다시 찾고 있는 것이다.

 

고택은 멀리서 바라보기보다는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 진가를 더욱 발휘한다. 구름처럼 너그럽고 포근한 공간에서 베풀고 나누며 가문을 지켜온 명문가 자손들의 내력과 자부심 등 그 집만이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또 자연과 어우러진 옛집은 사계절 내내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계곡 물이 시원하게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대청마루. 고택 뒤에 펼쳐진 작은 오솔길. 겨울에는 화롯불 앞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수 있는 포근한 공간. 이 마법 같은 고택에는 나그네의 여행과 추억을 더욱 풍요롭고 만드는 힘이 있다. 11월에는 바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고택을 돌아보며 느린 행복을 느껴보자!

 


 

일두고택 사랑채 끝으로 연결된 누마루에 서면 석가산 풍경 눈에 들어오고…

사계절 무시로 변하는 석가산 풍경 즐긴 사랑채 주인의 고상한 풍류 부러워

 

유배지에서 돌아와 생을 마칠 때까지 머무른 여유당은 정약용 숨결 서린 곳

다산은 여유당 돌아와 한강 보며 산책…선생 기리며 다산생태공원 걸어볼 만

 

1. 함양 일두고택

 

경남에는 한옥 마을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 개평한옥마을은 높은 기품을 간직한 동네로 유명하다. 오랜 시간을 견뎌온 한옥 60여 채가 모여 있고, 마을 중심에 이 지역의 정신적 뿌리 역할을 하는 함양 일두고택(국가민속문화재)이 자리한다. 건축한 지 수백 년이 흘렀지만, 보존 상태가 양호해 영남지역 양반 가옥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집 안 곳곳에 걸린 편액의 뜻을 하나하나 새기며 둘러보기도 좋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골목을 지나면 일두고택 정문에 닿는다. 15세기에 활약한 일두 정여창의 집이다. 정여창은 영남 사림파의 영수 김종직의 제자로 들어가 공부했다. 이후 성리학의 대가로 인정받았으며 이황·조광조·이언적·김굉필과 함께 동방오현에 올랐다. 그러나 무오사화(1498년)에 연루돼 유배지인 함경도 종성에서 생을 마감했고, 죽은 직후에 터진 갑자사화(1504년) 때는 부관참시 당하는 수모까지 겪었다. 말년과 사후가 순탄치 못했지만, 나중에는 성균관과 향교 문묘에 신주가 보관돼 성리학자로서 가장 큰 영광을 누렸다.

 

▲ 일두고택으로 들어가는 골목.  

 

지금의 일두고택은 정여창이 세상을 뜨고 약 1세기가 지나 건축했다. 이후 여러 차례 고치고 새로 지으며 오늘에 이른다. 입구에 당상관(정삼품 이상) 벼슬을 지낸 인물이 사는 집에 둘 수 있다는 솟을대문이 눈에 띈다. 조선 시대에는 고위 관료만 초헌(외바퀴가 달린 높은 수레)을 탈 수 있었는데, 솟을대문 높이가 초헌이 통과하기에 적당했다.

 

집 안팎에 걸린 편액에 일두고택의 자부심이 흐른다. 첫 자랑이 솟을대문 지붕 아래 있는 정려(旌閭)다. 나라에서 충신·효자·열녀가 나온 집에 내린 정려를 정여창 가문은 5개나 받았다. 하나를 받기도 어렵다는 점을 생각하면 매우 드문 경우다.

 

솟을대문을 지나면 너른 마당이 나오고, 오른쪽 대각선 방향으로 사랑채가 보인다. 높게 쌓은 기단이며 반듯한 돌계단, 앞으로 튀어나온 누마루와 마당에 조성한 석가산(石假山)까지 웅장한 사대부 고택이라는 인상을 풍긴다.

 

▲ 함양 일두고택의 사랑채.  

 

사랑채 아랫도리 부분에 걸어둔 문헌세가(文獻世家) 편액이 정여창의 후손이 사는 집이란 사실을 말해준다. 문헌은 나라에서 내린 시호다. 일두고택에 있는 여러 글씨 중 압권은 사랑채 방문 위에 붙은 충효절의(忠孝節義)다. 커다란 종이에 거침없이 쓴 글자에 기백이 흐르는 듯하다. 넓게 자른 나무판자가 아니라 종이에 써서 색이 바래고 해진 흔적마저 오랜 세월의 증거처럼 느껴진다.

 

사랑채 끝으로 연결된 누마루에 서면 석가산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이 조성했다고 하나, 장대하게 자란 소나무와 그 아래 삼봉(三峯)을 상징하며 세운 돌까지 영락없는 자연의 모습이다. 이 집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사계절 무시로 변하는 석가산의 풍경을 즐긴 사랑채 주인의 고상한 풍류가 새삼 부럽다. 누마루 천장 모서리에 걸린 탁청재(濯淸齋) 편액이 주변 경치와 잘 어울린다. ‘탁한 마음을 깨끗이 씻는 집’이란 뜻이다.

 

누마루에서는 며느리에게 살림을 넘겨준 어머니나 집안의 대를 이을 아들이 머물던 안사랑채 마당까지 훤히 보인다. 연로한 어머니를 살뜰히 보살피고 싶은 집주인의 효심과 자식을 바르게 가르치려는 부정(父情)이 모두 닿을 거리다.

 

사랑채 옆으로 안주인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적당한 높이로 헛담을 쌓고 일각문을 세웠다. 문틀 아랫부분에는 활이 굽은 모양으로 나무를 깎은 월방(月枋)을 설치했다. 여자들이 출입할 때 치맛단이 걸리지 않게 하려는 배려다.

 

▲ 안채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틀 아랫부분에 설치한 월방.  

 

중문을 지나면 비로소 안채가 나온다. 안주인이 편하게 움직이며 살림을 챙길 수 있도록 건물 앞뒤로 곳간(庫間)과 장독대를 두고, 공간은 개방적으로 구성했다. 안채 뒤에 있는 곡간(穀間)은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 기초공사 단계부터 주변 배수로를 깊이 파고, 바닥에 자갈과 숯을 여러 겹 깔았다. 안채 마당에 물건을 모아두는 곳간과 다른 창고다. 곡간 옆은 정여창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곡간보다 높게 짓고 지붕 단청을 화려하게 칠해 이 집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임을 강조했다.

 

▲ 일두고택 안채 뒤쪽에 있는 곡간.  

 

일두고택에서 가까운 거리에 함양 남계서원(사적)이 있다. 정여창이 세상을 떠나고 약 50년이 지난 1552년, 지역 선비들이 모여 일두를 기리고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건립했다. 1556년 명종이 사액해 남계서원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문루 형태로 지은 풍영루를 지나면 강의하던 명성당이 정면에 나타난다. 양쪽으로 유생이 머물던 양정재와 보인재, 애련헌, 영매헌 등을 배치했다. 명성당 뒤로 가면 사당에 오르는 길이 있다. 사당 문 앞에서 명성당과 풍영루 지붕 너머로 함양군의 들판이 보인다.

 

남계서원 바로 옆에 서원이 한 곳 더 있다. 문민공 김일손을 추모하며 세운 함양 청계서원(경남문화재자료)이다. 김일손도 김종직에게 학문을 배우고 무오사화 때 희생된 인물이다. 청계서원에는 수업하던 강당, 유생의 숙소 구경재와 역가재 등이 남아 있다.

 

함양박물관도 지나치기 아쉽다. 함양의 역사를 한눈에 살피고 다양한 유물과 자료를 둘러보기 좋다. 상설전시실에는 함양군의 선비 문화와 서원, 산성 등에 관한 유물과 자료를 전시한다.

 

<글·사진/이시우(여행작가)>

 

2. 남양주 여유당

 

다산 정약용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서 나고 자랐다. 선생이 유배지에서 돌아와 생을 마칠 때까지 머무른 여유당은 그의 숨결이 서린 곳이다. 한옥 자체는 특별해 보이지 않지만, 다산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장소라 생각하면 의미가 남다르다.

 

▲ 남양주 정약용유적지에 자리한 여유당.  

 

정약용은 유네스코 선정한 세계 기념 인물이자, 조선을 대표하는 실학자다. 5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으며 정치와 과학, 경제, 의학, 회화 등 다양한 분야에 업적을 남겼다. 정조가 수원 화성(사적)을 축성할 때는 거중기와 녹로 등 창의적인 기구를 설계해 공사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고, 백성의 수고를 덜었다.

 

정약용은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고향으로 내려와, 사랑채에 여유당(與猶堂) 현판을 걸었다. 여유는 ‘조심하고 경계하며 살라’는 뜻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망설이기를 겨울에 살얼음판 건너듯 조심하고, 겁내기를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신중히 하라”고 한 내용이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에 여유당이라는 당호를 붙였다고 한다. 다산은 조심히 살겠다고 다짐했으나, 이듬해부터 18년 동안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한다. 1818년 여유당으로 돌아와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을 정리했다.

 

▲ 사랑채에 걸린 ‘여유당’ 현판.  

 

정약용 유적지에 있는 여유당은 선생이 살던 집이 아니다. 1925년 대홍수로 집이 떠내려가, 1986년에 다시 세워졌다. 원래 모습을 가늠할 수 있는 사진과 생가에 살던 후손의 기억으로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 여유당은 사랑채와 안채로 구성되며, 다산 선생의 성품을 닮아 소박하다. 현재 사랑채에 걸린 현판은 운암 조용민 선생이 1990년에 쓴 글씨다. 여유당 상량문도 다시 제작했다. 상량문에는 여유당을 재건한 이유와 내력, 다산 선생의 일대기가 담겨 있다. 상량문 현판은 퇴계 선생의 14대손인 한학자 이가원 선생이 짓고 썼다.

 

존경받은 학자 정약용은 인간적인 면모도 훌륭했다. 유배지에서 아들과 딸에게 편지를 띄웠다. 부인이 보낸 치마를 잘라 두 아들에게 당부의 말을 적고, 딸에게 줄 그림을 그렸다. 다산 선생과 홍씨 부인의 회혼례 이야기도 전해진다. 선생은 여유당에서 혼인 60년 기념행사를 열 예정이었는데, 안타깝게 회혼례 당일 세상을 떠났다. 회혼을 맞아 쓴 시가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남았다. 남양주시는 정약용 선생의 회혼례를 기리기 위해, 혼인 60주년을 맞은 부부를 대상으로 여유당에서 이를 재현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여유당 뒤 언덕에 선생과 부인을 합장한 정약용 선생 묘(경기기념물)가, 언덕 아래 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이 있다. 선생이 회갑 때 삶을 회고하며 쓴 묘지명으로, 이 글에서 자신을 사암(俟菴)이라 칭했다. 사암은 다산·삼미·열수 등 정약용의 호 가운데 하나다. ‘풀이나 짚으로 지붕을 만든 작은 집에서 세월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자신의 학문적 성취가 후대에 인정받기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정약용 유적지에는 여유당과 정약용 선생 묘 외에 시대를 앞서간 다산의 자취를 전시한 기념관, 선생을 현대적으로 재조명한 문화관이 있다.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문도사도 자리한다. 문도사는 다산의 사상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고종이 나라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인물을 복권하고 시호를 내렸는데, 다산 선생도 문도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에 따라 사당 이름을 문도사로 지었다.

 

▲ 상공에서 본 정약용유적지.  

 

정약용 유적지를 여행할 때는 배우 정해인이 녹음에 참여한 오디오 가이드를 이용하자. 유적지에 관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들을 수 있다. 정약용 유적지 운영 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월요일, 1월 1일, 명절 당일 휴관), 입장료는 없다.

 

정약용 유적지 건너편에 있는 실학박물관은 조선 후기 실학의 탄생과 변화 과정을 살펴보는 곳이다. 1층 기획전시실, 2층 상설전시실로 구성된다. 곤여만국전도(보물)를 입체적으로 제작한 ‘빙글빙글 곤여만국전도’를 비롯해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전시가 많아 흥미롭다. 제3전시실 대형 LED 스크린에서 상영하는 〈1787 : 스페이스 오디세이〉 영상을 놓치지 말자. 선조들이 남긴 과학 발전을 실감 나게 감상할 수 있다.

 

실학박물관에서 도보 5분 거리에 다산생태공원이 있다. 정약용 선생은 여유당으로 돌아와 한강을 바라보며 산책하곤 했다. 공원에는 여유당집 상징물 등 포토 존과 다산의 업적을 소개한 표지판이 있어 선생을 생각하며 걷기 좋다. 사시사철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다산생태공원에서는 반려동물과 산책도 가능하다. 경사가 완만해 오르기 쉬운 전망대에서는 팔당호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 사시사철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다산생태공원과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팔당호.  


집으로 돌아가기 전 능내역에 들르자. 2008년 중앙선(현 경의중앙선) 복선전철 노선이 국수역까지 연장되면서 능내역은 문을 닫았지만, 옛 중앙선 기찻길이 남아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기차가 다니지 않아도 역사(驛舍)는 그대로 있다. 기차를 기다리던 의자와 빛바랜 흑백사진이 레트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능내역 앞은 국토종주자전거길 남한강자전거길 코스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이들이 자주 눈에 띈다.

 

<글·사진/채지형(여행작가)>

<콘텐츠 제공=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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